[단독]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3대 역사’ 막 내려… 딜쿠샤 지은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 타계 기사의 사진
서울 행촌동 붉은 벽돌집 ‘딜쿠샤’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브루스 테일러가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멘도시노의 자택에서 촬영한 사진. 그는 “고향(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지난주 세상을 떠났다. 김익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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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nt to go home(고향에 가고 싶구나)….”

지난 19일 오후 2시30분(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작은 도시 멘도시노에서 백발의 남성이 숨을 거두기 직전 가족들에게 읊조리듯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이름은 브루스 테일러.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증언하는 붉은 벽돌집 ‘딜쿠샤’(국민일보 1월 9일자 11면 참조)의 상속자이자,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을 세계에 알렸던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의 외동아들이다.

그의 딸 제니퍼 테일러는 딜쿠샤의 존재를 2006년 세상에 다시 알린 김익상 서일대 영화방송예술과 교수에게 부고(訃告)를 전하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은 당신이 태어나고 당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한국에 가고 싶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테일러 일가(一家)와 한국의 인연은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금 전문가였던 미국인 조지 테일러가 평안북도 운산금광 개발을 위해 한국을 찾은 게 시작이었다. 아들 앨버트 테일러는 UPI 서울 통신원으로 일하며 1919년 3·1독립선언서 내용을 세계에 타전했다. 1923년에는 서울 사직터널 위편 언덕에 벽돌집을 짓고, 그 집에 힌디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을 뜻하는 ‘딜쿠샤’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 네 살이던 브루스 테일러는 유년시절 대부분을 딜쿠샤에서 보냈다. 어머니의 모국인 영국에서 지낸 유학생활 4년을 제외하면 모두 15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제니퍼 테일러는 “아버지는 나에게 늘 한국에서 살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며 “아버지에겐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한국이란 나라와 한국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고 전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일제에 의해 테일러 가족은 쫓겨나듯 한국을 떠나야 했다. 딜쿠샤는 ‘빈집’처럼 방치됐다. 이후 브루스는 미군에 입대해 종군기자 겸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종전 후엔 멘도시노에서 고교 영어 교사로 30년간 근무하며 여생을 보냈다.

브루스와 딜쿠샤가 재회한 건 60여년 뒤였다. 2005년 김익상 교수는 ‘한 미국인 가족이 자신들의 한국 독립운동 관여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으로 브루스를 찾아간 김 교수는 “수십년 전 서울을 떠난 그의 기억에는 ‘이치반지(ICHI-BANJI·일번지)’라는 일본식 주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며 “과거 앨버트가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고, 딜쿠샤 창 너머로 서대문형무소가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 종로구 행촌동 인근을 뒤진 끝에 딜쿠샤를 찾았다”고 전했다.

2006년 브루스는 가족과 함께 서울에 왔다. 세월의 풍파에 방치된 딜쿠샤의 행색은 초라했다. 지붕의 기와는 모두 없어져 방수포를 덮었고 벽돌은 무너질 듯 아슬했다. 김 교수는 “브루스는 딜쿠샤가 초라하게 변한 모습을 보고도 어떤 불평이나 항의도 하지 않았다”며 “그저 집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4월 25일. 그는 아내 조이스 테일러의 묘지 옆에 안장됐다. 한국 근현대사의 목격자이자,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3대의 역사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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