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울지 않는 나라 기사의 사진
“아테네인 여러분.” 이 말은 조금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국민 여러분”과 같은 유형의 말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들어 온 것이니까. 그러나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평생에 한 번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젊은이들을 가르쳐 왔고, 그것 때문에 사형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 여러분”과 같은 대중연설적 용어를 사형 법정에서 처음 사용했다니 특별해 보이지 않는가.

정암학당의 근간(近刊)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평생 선생이기를 자처하지 않았고, 정치인들과 달리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 개인들의 정신적 삶이 반성되고 스스로 변화되기를 도우려 했던 현인이다. 이 책을 옮긴 강철웅 강릉원주대 교수는 사형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칠십평생 처음으로 이런 식의 언설을 통해 자신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배심원단, 즉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시도했다고 설명한다. 기원전 5세기, 계속되는 패전과 정변으로 사회가 흉흉해지자 희생양이 필요했던 아테네는 최종심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그때 그는 “아테네인 여러분”이라는 말로 첫 공적인 대화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평생 선생으로 살았던 소크라테스가 남을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곳이 사형 법정이 아니었다면 “아테네인 여러분”과 같은 대중연설을 그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일방적으로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가르치는 행위는 영혼을 파괴시킨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전집 중 한 권인 ‘파이드로스’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가 가진 로고스 사랑(이야기 사랑)이 치기 어린 것일 수 있지만 폄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벽 밖 일리소스 강변의 시원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 그걸 잘 키워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함께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키워가는 대화, 그것이 소크라테스 교육의 핵심이었다.

지금 성완종 비자금 논란을 벌이고 있는 우리 사회 어느 분야에서도 이런 지성적 고려를 볼 수 없다.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상대방의 말은 거짓말이거나 꼼수라고 몰아쳐 왔다. 남이 죽든 말든 관계없이 말이다. 이렇게 남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 된 사회에서는 갈등을 해소시킬 여지를 찾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상처를 봉합하지 못하고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주변국 국민들이 대형 사고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비교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눈물은 흘리는 사람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모두 영혼을 맑게 하는 보약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간밤의 연서처럼 백퍼센트 정신의 순금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타인에게 보여줘서는 곤란하다. 감성과 충동의 눈물을 습관처럼 보여주는 사회는 요즘 장안에 회자되는 ‘유체이탈화법’과 같이, 사돈 남 말 하듯 하는 무책임을 키우는 온상이 될 것이다.

쉽게 눈물이 통용되는 사회, 추모 시위가 쉽게 시가전처럼 되어버리는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고 설교자이고 훈육자이기를 자처한다. 요즘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이 죄다 그런 것 같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붐을 일으킨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한 것이 훈시였는가, 아니면 대화였는가.

자녀를 잃은 가엾은 부모가 위로를 받기는커녕 투사가 되어 국제적 조명을 받는 시사적 인물로 재탄생되는 것은 시대적인 비극이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건실하게 자기의 위치를 지켜줘야 한다. 언제까지 울고 당하고, 울고 부수고 그럴 것인가.

임순만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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