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인터뷰] 김종설 사무국장 “이준 열사, 을사늑약 반대투쟁”

서울 상동교회 민족교회硏 김종설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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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동교회 부설 민족교회연구소 김종설(70·사진) 사무국장은 “이준 열사는 전덕기(1875∼1914) 서울 상동교회 목사보다 16세 위였지만 전 목사를 믿음의 어른으로 모시며 철저히 신앙생활을 했다”면서 “이 열사는 독립운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주일예배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1900년대 초 상동교회에 입교한 이 열사는 전 목사와 독립운동의 동지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면서 “전 목사는 1905년부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이 소문이 전국에 퍼져 그와 뜻을 함께하는 많은 독립지사와 애국자들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1896년 시(施)병원을 통해 의료선교활동을 펼치던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전 목사는 신민회 발기인 7명 중 한 명으로 신민회 재무를 총괄했다. 상동청년학원을 조직해 청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시키고 그들을 독립운동가로 길러냈지만 1914년 3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 사무국장은 “전 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 열사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다가 1904년 친일파의 모함으로 황해도 황주 철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갔는데 이곳에서 성경을 읽으며 깊은 신앙체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 열사는 1905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을사늑약 반대투쟁 때 청년회장 신분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특사 파견 논의가 이뤄진 곳도 상동교회 지하다. 아쉽게도 상동교회 옛 건물은 지금의 예배당을 지으면서 철거됐고, 이 열사 관련 자료도 등사사본인 ‘이준 열사 약사(略史)’밖에 없다.

김 사무국장은 “이 열사가 1907년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서울을 출발하기 전에 전 목사 자택에서 기도와 축복을 받았다”면서 “을사늑약 반대투쟁, 신민회 활동, 헤이그 특사파견의 중심에 섰던 상동교회의 모습은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글=백상현 기자·사진=강민석 선임기자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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