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절판본 사냥꾼’들 희귀본을 쫓는다 기사의 사진
직장인 김모(26·여)씨는 주말마다 중고책방을 뒤졌다. 민음사가 펴냈는데 2009년 절판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소설 ‘롤리타’를 찾아서였다. 지난달 말 김씨는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이 책을 3만원에 샀다. 정가는 8500원이다. 김씨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책 사진을 올리자 순식간에 “나도 그 책을 찾아 헤맸다” “부럽다” 등 여러 댓글이 달렸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신모(32)씨는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찾는다. 절판된 전공서적, 참고서적을 ‘발굴’하기 위해서다. 종이매체의 운명이 다했다는 비관론은 아직 통하지 않는다. 자취를 감춘 책의 뒤를 쫓는 ‘절판본 사냥꾼’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그들은 왜 절판본에 열광하는 걸까.

출판사는 수요를 보고 증쇄와 개정을 거듭한다. ‘절판’ 사실이 드러나는 건 시중에 풀린 책이 모두 팔린 뒤다. 대한출판문화협회 관계자는 “출판중단 도서목록이 집계되거나 공지되는 체계는 없다. 절판 사실은 결국 독자의 수요를 통해 알려지게 된다”고 했다. 찾는 사람이 있는데 그 책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절판이 입증되는 식이다.

수요와 무관하게 이뤄진 절판은 ‘사냥꾼’을 낳는다. 출판사가 폐업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고려원 사태’가 그랬다. 연평균 270여종의 책을 펴내던 고려원은 1997년 외환위기 직전 부도가 났다. 그러면서 2만여종의 문학·인문·실용서적이 일제히 절판됐다. 2004년 고려원북스가 고려원의 재고와 판권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아 영업을 재개했다. 그 사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등은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됐다.

작가가 손수 절판을 선언하기도 한다. 황석영은 2012년 소설 ‘여울물 소리’를 펴낸 출판사 ‘자음과 모음’이 베스트셀러 조작을 위한 사재기 문제로 논란을 빚자 직접 책의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지난해 11월 출판사 창비에서 복간됐다. 법정스님은 2010년 작고하면서 ‘무소유’ 등 저서 20여종을 모두 절판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1988년 출간된 장정일의 처녀작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도 작가 요청으로 초판 1쇄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작가가 유명세를 타면서 웃돈을 잔뜩 얹어도 못 사는 ‘희귀본’이 됐다.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하는 바람에 절판된 책도 있다. 주로 만화나 로맨스 소설이지만 마르키 드 사드의 ‘소돔 120일’ 같은 고전문학도 이렇게 사라졌다. 이 책은 교황청 금서로 2세기 가까이 묶였다가 1957년 족쇄가 풀렸고 국내에선 1990년, 2000년에 각각 출판됐지만 금서로 지정되며 절판됐다. 2012년 동서문화사가 재출간한 책도 유통이 금지되는 ‘유해간행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가 독자들의 항의로 ‘청소년유해매체물’로 분류돼 시중에 풀렸다.

절판된 특정 판본이 인기를 끄는 경우도 있다. 2009년 절판된 민음사의 ‘롤리타’는 2013년 문학동네 복간판이 있는데도 평균 3만원에 거래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현재 유통되는 홍영남 번역의 을유문화사 출판본이 아닌 이용철 번역의 1997년 두산동아 출판본이 원가 4200원의 10배에 달하는 4만원 이상에 거래된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곽복희가 번역한 청년사의 1990년판이 대학의 사학과 수업에서 애용하는 판본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히 찾는 손길이 많다.





사라진 책의 흔적을 뒤쫓는 첫 관문은 출판사다. 서점 도서목록에 절판으로 표기돼도 출판사에는 소량의 재고가 남아 있을 때가 많다. 절판본은 주로 중고시장에서 거래된다. 오프라인 헌책방이나 온라인 중고마켓을 이 잡듯 뒤지는 식이다. 인문사회서적 ‘사냥’에 나서는 신씨는 “프리미엄이 붙어 출간 당시 원가의 10배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지만 없어서 못 사는 게 대부분”이라며 “희귀한 책을 찾는 사람들은 가격에 구애받지 않을 뿐더러 책을 찾는 데 쏟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품절도서 의뢰센터’는 사라진 책을 찾는 과정을 대행한다. 절판 도서 구입을 의뢰하면 서적도매상, 대형서점, 출판사, 중고매장 등을 뒤져 구해준다. 2012년 10월에 시작된 이 서비스를 찾는 고객은 매년 늘고 있다. 올 들어 3월까지 신청 건수만 1만건이 넘어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했다. 올해 신청한 고객 중 30%는 원하는 책을 찾았다. 중고도서로 찾은 게 30%, 출판사를 통해 구한 게 70%다. 소설·시·희곡 분야를 찾는 건수가 18.6%로 가장 많다. 이어 종교·역학(12.4%), 인문학(8.3%) 순이다.

책의 내용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에는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전체를 제본하면 저작권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책을 나눠서 제본하는 식이다. 장서가 한모(43)씨는 “절판된 책을 소장한 사람의 블로그 리뷰를 보고 댓글을 남겨 제본을 구하기도 한다”며 “같은 방법으로 몇 차례 내가 가진 희귀본을 나눈 적도 있다”고 말했다.

‘POD’(주문형 출판·Publish On Demand)도 한때 절판본 사냥꾼의 각광을 받았다. 출판물을 디지털 파일 형태로 저장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디지털 인쇄기를 통해 단시간에 원하는 부수만큼 제작하는 서비스다. 교보문고가 2012년 도입했다. 현재 POD 서비스를 통해 출판 가능한 도서는 3298종. 이 가운데 국내 출판사 품절 도서는 489종이다.





대안이 될 것으로 보였던 교보문고 POD 서비스는 주춤하고 있다. 디지털 인쇄에 필요한 원본 데이터가 분실된 2000년대 이전 도서는 복간이 불가능할 뿐더러 출판사 협조를 받기도 쉽지 않아서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출판사들이 절판으로 희소해진 도서의 복간을 기다리는 경우도 많아서 절판도서의 판권을 넘기길 꺼린다”고 설명했다.

외국에서는 절판도서 복간이 더 체계적으로 이뤄진다. 에이어 컴퍼니는 절판도서 목록을 주기적으로 정리해 영어권 도서 재출간을 주도한다. 도쿄대학출판회, 미스즈출판사, 기노쿠니야 등 일본 출판업계는 ‘서물복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웹사이트에 복간작을 예고하고 독자들이 신청한 도서를 추려 복간을 결정한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관계자는 “도서 품절·절판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체계는 국내에 없다”며 “체계가 갖춰진다면 독자나 서점에 유용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독일뿐이다. 민간이 운영하는 출판협회(VLB) 웹사이트로 판매되는 도서와 생산되는 도서의 관련 자료가 실시간 전송돼 통합 관리된다.

절판본 사냥꾼이 탄생한 이면에는 책의 수명이 짧은 우리 출판 생태계의 고질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윤세민 한국출판학회장은 “국내 5만여개 출판사 중 연간 20종 이하의 책을 내는 곳이 82%”라며 “내실 있는 출판사는 적고 시장이 어렵다 보니 한두 권 출판해보고 즉각적 수요가 없으면 절판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팔리는 책’에만 기획과 출간이 집중되면서 외국에 비해 문학·인문·학술서적이 쉽게 절판되고 있다”며 “도서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측면에서 고민해볼 문제”라고 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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