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옳다는 것이 다 옳은 것만 아니다 기사의 사진
누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의 결과가 비상식적이고 불의한 일로 끝날 때가 있다. 이 나라를 안갯속에 밀어 넣은 성완종 게이트를 보면서 참 혼란스럽다. 성 전 경남기업 회장이 얼마나 억울하다고 생각했으면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을까. 하지만 성 전 회장의 죽음 이후 그가 비난했던 사람 중에 누구도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4·29재보선과 2016년 총선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여야가 서로의 허물을 들추며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고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양쪽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은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 때문일 때가 더 많다. 게다가 자신의 의를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종교전쟁’보다 잔인한 비극은 없다. 옳음을 주장하는 신념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안다.

스티브 맥베이가 쓴 ‘은혜가 다스리는 삶’이라는 책을 보면 ‘자비’와 ‘은혜’의 차이를 구별하여 설명한다. 자비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원하는 마땅한 용서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땅히 베푸는 선행이다. 그러나 은혜는 용서 이상의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설명인데, 운전하다 법규위반으로 경찰에게 잡혔을 때 딱지를 떼지 않는 것은 ‘자비’다. 하지만 딱지를 떼지 않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경찰에게서 다른 호의를 받았다면 ‘은혜’다.

이 세상의 비극이 옳음을 외치는 사람들의 이기적 싸움에서 왔다면 이 세상의 변화는 옳음을 넘어선 은혜를 베푼 사람들 때문에 왔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옳음을 살기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은혜’라는 말이 때로 공의와 정의를 무시하고 불의를 덮거나, 누군가의 일방적인 양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은혜는 공의와 정의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다. 오래전 아이스크림 광고에 이런 것이 있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놓고 연인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주는 거야!” 그리고는 상대방의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먹는다. 사랑이 주는 것은 맞지만, 상대방의 것을 빼앗으며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독선이다.

목사로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거둔 승리가 과연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모든 교회가 꿈꾸는 초대교회 공동체에도 갈등이 생겼다. 악한 일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 때문에, 아무리 최선을 다해 도와줘도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공의롭다고 느끼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이제 사도들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일곱 집사를 뽑고, 자신들은 해야만 하는 일, 즉 기도에 힘쓰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렇게 한 것은 돕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자신이 해야 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옳음으로 이 세상이 결코 정의롭거나 공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완종 게이트로 인해 연일 쏟아지는 비난들. 국민은 다 알고 있다.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추악함만 드러낼 뿐이다. 우리 국민이 바라는 것은 상대방의 티끌을 침소봉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바라보는 정치인이 많아지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성실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옳다는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옳게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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