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주흘산 바람꽃 칼바람 이겨내다 기사의 사진
주흘산 주봉 인근의 피나물 군락지. 문경=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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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칼바람이 매섭게 지나가면서 마지막 남은 벚꽃, 복사꽃 꽃잎이 휘날린다. 분홍빛 꽃잎이 아직 선연한 흙길 옆으로는 홀아비바람꽃, 피나물, 노란제비꽃, 벌깨덩굴 등 봄철 야생화가 색색의 꽃 융단을 깔아놓았다. 지난 4일 경북 문경시 주흘산(1106m) 주봉(1076m) 근처였다. 주흘산은 야생화 애호가들이 손에 꼽는 명소 중 하나다. 특히 이른 봄부터 초여름 고산지대를 수놓는 바람꽃 종류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등산은 문경읍 문경새재 진입로에서 1관문(주흘관)∼혜국사∼주봉∼2관문(조곡관)∼1관문 코스를 택했다. 환경부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식물분류사인 박대문(전 수도권매립지공사 사장) 시인이 동행했다. 새재 길을 벗어나 혜국사 쪽으로 향하니 매화말발도리, 병꽃나무, 으름덩굴 등의 관목(떨기나무)들이 꽃을 피웠다. 으름덩굴은 암수한그루로 아래쪽에 달리는 자홍색의 암꽃은 밑 부분에 달려 있다. 박 시인은 “으름덩굴 꽃이 눈에 잘 안 띄지만 가까이 보면 매우 예쁘고 근접 촬영의 효과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사실 5월 초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좋은 계절이다. 그렇지만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문경새재와 주흘산은 각별하다.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嶺)로 조선시대 옛길(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높은 고갯길이다. 조선시대의 경부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문경새재는 난리를 피해가는 왕, 부임하는 고위관료, 파발, 과거 보려는 선비 등 온갖 인간 군상이 오갔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진격로이기도 했지만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이 거치는 길이기도 했다. 오늘날 문경새재는 평탄하고 넓은 탐방로, 그것과 대비되는 주변의 1000m급 높은 산들, 주변의 숱한 유적들과 풍부한 스토리텔링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등산로 주변으로 콩제비꽃, 졸방제비꽃 등 제비꽃 종류 가운데 일부 꽃이 남아 있다. 혜국사는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당시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신하다가 잠시 몸을 의탁했던 곳이다. 원래 명칭은 법흥사였지만 개성으로 돌아간 공민왕이 재물을 하사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인 혜국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봉우리 사이에 묻힌 사찰과 그 주변 경치는 활엽수와 침엽수가 뒤섞여 그려내는 연둣빛과 녹색의 향연이다.

혜국사에서 주봉까지는 본격적인 산행이다. 해발고도가 높아지자 귀한 꽃들이 보인다. 용둥굴레, 참개별꽃, 빗살현호색, 노란제비꽃, 산괴불주머니, 홀아비바람꽃 등이 나타났다. 샘터가 있는 대궐터에 도착했다. 해발 850m인 이곳엔 1970년대까지만 해도 20여 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넓지 않은 공터에 요즘 보기 힘든 토종 민들레가 많이 피어 있다.

주봉은 주흘산 정상인 영봉보다 낮지만 조망이 더 뛰어나다. 문경읍내와 백두대간을 이루는 부봉, 월악산, 조령산 등이 보인다.

하산 길은 조곡(鳥谷)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홀아비바람꽃과 노란 꽃을 피운 피나물 천지다. 이곳에서 바람꽃들을 많이 관찰할 수 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지만, 홀아비바람꽃 이외에는 회리바람꽃 몇 송이만 볼 수 있었다. 회리바람꽃은 조그만 노란 꽃이 마치 회오리를 일으키듯 모여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박 시인은 “나도바람꽃 정도는 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바람꽃은 종류가 10여종으로 많지 않은 데다 개화기간이 열흘 정도로 짧아서 제때에 관찰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돌길 너덜지대를 지나면 ‘꽃밭서들’로 불리는 돌탑 무더기 언덕이 눈길을 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소원을 빌었을까. 꽃밭서들의 진달래꽃은 다 지고 없지만 계곡을 가리고 피어 있는 귀룽나무 흰 꽃이 반갑다. 다른 장미과 나무들이 거의 다 꽃을 떨군 후라 더욱 애틋하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가 떠오른다. ‘인간세상 사월엔 꽃들 모두 졌는데/ 산사의 복사꽃은 이제 막 한창일세/ 가버린 봄 찾을 길 없어 늘 한스러웠는데/ 이곳으로 옮겨온 줄 모르고 있었네’(대림사 도화)

2관문인 조곡관에서 1관문까지 내려가는 길은 많은 가족 단위 인파 속에 공원에 산책 나온 듯한 느낌이다. 조선시대에는 험한 고개였다지만 구불구불하고 좁은 옛길을 직선으로 넓힌 덕에 ‘신작로’가 됐다. 그렇지만 문경새재는 무엇보다도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는 게 중요하다. 조선시대 한양과 영남을 잇는 고개 가운데 죽령이나 이화령과 달리 문경새재가 흙길로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자 축복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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