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정부는 왜 국민연금 불신 조장할까 기사의 사진
정부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상향 움직임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1702조원의 세금폭탄’ ‘세대 간 도적질’ ‘미래세대 재앙’…. 대통령도 청와대 대변인도 보험료를 세금으로 굳이 둔갑시키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보험료는 가입자와 사용자가 내는 것이지 세금에서는 안 나온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보험료율 9%를 그대로 두고 명목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이면 기금이 고갈되는 시점인 2056년부터 2080년까지 추가로 들어가는 돈이 1702조원이라는 것도 의도적 허위사실이다. 연금기금의 투자수익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3차 국민연금 장기재정전망 자료에 따르면 2015∼2044년 연금기금의 투자수익 전망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1∼2.6%로 2.4∼2.7%인 보험료 수입에 육박한다.

국민연금은 지급수준에 물가상승분을 반영하게 돼 있기 때문에 5년마다 한 번씩 장기적 연금 재정추계를 한 다음 보험료율 조정 여부를 결정한다. 청와대의 ‘숫자적 폭력’은 2080년까지 국민소득이 오르고, 보험료 납부 능력이 커짐에 따라 보험료율이 자연스럽게 높아진다는 변수를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역대 정부들이 내세운 국민소득 4만 달러 공약은 어디로 내팽개친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처럼 연금 수혜 혜택을 본격적으로 누리기도 전에 소득대체율을 대폭(70→40%) 삭감한 나라는 세계 연금 역사상 없다. 또한 국민연금의 지난 2월 말 기금규모는 482조원으로 GDP 대비 35%에 이른다. GDP대비 30%가 넘는 공적연금 기금을 보유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국민연금은 노후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고, 기금안정성은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마치 기금안정성이 목적인 것처럼 말한다.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4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 노인자살률도 1위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지금의 국민연금 지급수준은 높이는 게 마땅하다. ‘세대 간 도적질’도 연금제도의 취지를 오도하는 표현이다. 사회보험의 원리가 당초 ‘현세대의 연금을 미래세대가 부담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우격다짐은 내일 잘살기 위해 오늘의 내핍을 강요했던 개발독재 시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래세대의 ‘적정한’ 부담규모는 물론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해야 한다. 보험료율 인상은 불가피하지만, 당분간 인상폭은 높지 않아도 된다. 실질 소득대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입기간 연장, 보험료 상한액 인상 등의 방법도 있다. 우리나라의 실질 소득대체율이 명목 소득대체율에 비해 크게 낮은 것은 청년실업과 낮은 취업률, 군복무기간, 여성들의 경력단절, 자영업자의 가입기피, 폭넓은 납부예외 인정 등의 요인 탓에 가입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이들 요인의 개선이야말로 정부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들이고, 덩달아 보험료 수입과 연금혜택도 늘어나니 일석이조다.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런 과업은 포기하거나 추진해도 별 성과를 못 내면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만 키우고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 적립금을 가급적 쌓으려 하고, 연금지급액은 늘리지 않으려고 한다. 국민연금 기금을 경기부양을 위한 뭉칫돈으로 쓰려는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산업계와 경제부처들은 기업의 사회보험료 부담과 사회복지 부문의 비중 증가에 반대한다. 정치권도 결정적일 때 국민보다는 공무원, 약사 등 결속력이 훨씬 더 큰 이익집단 편을 든다. 이제 국민연금의 주인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을 지키기 위한 시민의 모임’을 만들고, 연금정책 결정기구에 서 시민단체의 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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