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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손수호] 아내들이여, 여행을 떠나라

가사 노동과 환경의 가치 발견할 기회… ‘식탁에 밥 한 톨 안 흘리는’ 변화 올 것

[청사초롱-손수호] 아내들이여, 여행을 떠나라 기사의 사진
놀아도 마냥 놀 수 없는 직업이 있다. 기자가 그렇다. 늘 쫓기고 긴장하는 터라 휴일을 기다리면서도 며칠만 지나면 슬슬 불안해지는 속성이 있다. 취재원 한 명이라도 더 만나면 기사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수도 비슷하다. 독서량에 따라 강의의 깊이가 좌우되니 휴일에도 연구실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 두 직업을 번갈아가며 경험하고 있는 나는 늘 바쁜 사정을 집안일을 피하는 핑곗거리로 삼는다. 설거지나 청소, 빨래개기 등 단순노동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여행을 갔으니 비상사태다. 아내의 공백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여행 때는 바깥 약속을 연달아 잡으며 대부분 외식으로 해결했다. 휴일엔 밥통 가득한 밥과 밑반찬으로 해결하니 아쉬움이 없었다.

이번엔 달랐다. 몇 끼 연속 바깥에서 먹으니 속이 니글거렸다. 김치 깻잎 김으로 구성된 단순 식단에 물릴 즈음 요리 생각이 났다. 찌개라도 해먹을 요량으로 마트에 갔다. 짐꾼으로 따라가 시식코너 주변을 빈둥거린 적은 많지만 주체적으로 장을 보긴 처음이었다.

세상에!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축산물 코너를 가니 쇠고기가 용도별로 잘 포장돼 있었는데, 하나같이 보석처럼 매끈했다. 국거리용은 반짝반짝 팬시상품처럼, 볶음용은 우동의 면발처럼 곱게 진열돼 있었다. 갈비짝째 매달려 있는 정육점의 풍경이 없으니 도축의 공포나 동물을 가엾게 여기는 애긍심이 생길 여지도 없었다.

생활용품의 셈법은 혼란스러웠다. 면도날을 사면 면도기를 끼워주는데, 그 값이 면도날보다 쌌다. 아무리 캠페인 기간이고, 면도기가 많이 보급돼야 면도날이 잘 팔린다 해도 소비자를 바보로 만드는 마케팅 아닌가. 수산물 코너에서 6마리 담긴 전복이 1만8000원에서 6시에 이르러 갑자기 9900원으로 바뀌는 장면은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집에서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적은 과대포장이다. 잠깐 소비자의 눈을 현혹시킬 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다. 스테이플러 심을 떼어내야 하고, 우유 곽은 해체해야 한다. 쓰레기장에서 묵묵히 분리작업을 해본 사람은 생각한다. “무릇 포장하는 자는 해체하는 자의 수고로움을 생각해야 한다!”

요리는 경건한 작업이다. 음식물쓰레기를 남기지 않도록 알뜰히 다듬어야 한다. 일단 완성되면 맛을 떠나 정성껏 먹는 게 미덕이다. 밥과 반찬을 먹으며 소리 내는 것은 에티켓 차원이지만 흘리면 환경문제가 된다. 걸레질을 해야 하고, 닦은 걸레는 물에 빨아 말려야 한다. 장보기에서 요리에 이르는 길은 대장정이다. 한 끼를 끝내고 소파에 앉으면 녹초가 된다.

이런 날을 며칠 보내고 나니 윤리적 소비의 관점이 어렴풋이 생겼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이 연고다. 집집마다 후시딘이니, 마데카솔이니 하는 것들이 몇 개씩 쌓여 있는데, 이런 것은 몇 달 지나면 약효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가정용 병원용 구분 없이 대용량 제품만 만들어 내니 주둥이 말라버린 연고가 수두룩하다. 소비자를 고려하지 않은 물건이 연고뿐이겠는가.

아내의 부재는 뜻밖의 각성을 몰고 왔다. 청소 아줌마가 있는 직장에서 아무 것이나 쓰레기통에 휙휙 집어던지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세계다.

아내들이여, 자주 여행을 가라. 가정의 평화와 지구의 건강에 기여할 것이니.

자꾸 떠나면 힘들지 않느냐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짜릿한 해방감과 호젓한 시간으로 보상받는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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