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기독인 주축 독립운동 펼친 임정 청사 옛 모습 생생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3) 중국 (下)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들의 명암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기독인 주축 독립운동 펼친 임정 청사 옛 모습 생생 기사의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유적지 입구. 3층짜리 서양식 건물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했던 부엌과 침실, 집무실 등이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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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上海)의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청사는 고층 빌딩과 호화 쇼핑몰이 즐비한 신톈디(新天地) 건너편에 있다. 청사 앞을 지나는 길인 마당루(馬當路)는 홍콩 자본이 일군 고급 관광지 신톈디와 청사가 있는 허름한 골목을 가르는 경계선과 같았다.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신톈디 쪽 거리는 식사와 쇼핑을 하러 상가를 찾은 각국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반면 청사 쪽 거리는 주민들이 거닐 뿐 한산한 모습이었다. 길 하나 사이로 도시의 명암이 갈린 이곳에서 96년 전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며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다.

◇기독인 주축, 상하이 임정의 수립=상하이 임정은 1919년 4월 13일 수립됐다. 3·1운동 후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창설된 임정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청사를 두고 독립군 양성, 외교 활동 등 공식 업무를 수행했다. 주축은 기독인들이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외무총장 김규식, 내무총장 안창호,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선생 등이 임정에 각료로 이름을 올린 기독인들이다. 그러나 타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프랑스 조계 당국은 1919년 10월 임정 건물을 폐쇄해 버렸다. 이후 임정은 일반 주택이나 다른 단체의 사무실 등을 전전했다.

임정이 안정적인 청사를 마련한 것은 1926년이다. 당시 ‘백래니몽 마랑로 보경리 4호’(현 마당루 306롱 4호)로 청사를 이전했는데 이곳이 지금 남아 있는 상하이 임정 유적지다. 임정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의거가 있던 1932년까지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다.

상하이 청사 유적은 임정의 여러 청사 중에서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된 곳이다. 상하이 루완구청(현 황푸구청)은 이곳 청사를 보존하기 위해 1990년 구청 문화재로 지정했다. 이후 상하이시와 한국 독립기념관, 삼성물산 등이 힘을 모아 3여년간 청사의 옛 모습을 복원했다.

상하이 임정 청사 유적은 3층짜리 옛 서양식 건물이다. 1·2층에는 임정 요인들이 사용했던 부엌과 침실, 김구 선생 집무실 등이 재현돼 있다.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3층에 이르면 임정의 활약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나온다. 이곳에는 상하이 임정의 업적뿐 아니라 이곳에서 쫓겨난 뒤 8년 만에 정착한 충칭 시절 임정의 행적, 광복군의 창설과정 등도 한국어와 중국어로 자세히 적혀 있다.

그러나 임정 청사 유적을 벗어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근처에 있던 인성학교만해도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인성학교는 기독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설립한 곳으로 1916년 상하이 한인기독교소학교로 출발해 1919년부터 임정 산하 학교로 운영됐다. 임정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의 아들딸들은 이곳에서 독립정신을 길렀다. 임정과 마찬가지로 인성학교도 윤봉길 의사 의거 후인 1935년 11월 일제의 탄압을 받아 폐교됐다. 인성학교의 옛 주소를 들고 찾아가 봤지만 건물 외벽 곳곳에 빨래가 널려 있는 민가가 있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주민들에게 한국 학교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고개만 저었다.

◇이국 땅에 외로이 묻힌 항일투사들=꿈에도 그리던 조국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이한 독립투사들도 인성학교와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링위안루 쑹칭링능원 내 외국인묘원에는 많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돌보는 손길 없이 쓸쓸히 잠들어 있었다.

이곳 외국인묘원에 묻힌 한국인 독립투사의 수를 정확히 헤아리긴 어렵다. 쑹칭링능원에서 따로 집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묘지석에 적힌 이름을 보고 한국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다. 임정 참모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노백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힘쓴 안태국,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김인전 선생 등의 묘지석은 그나마 한글로 적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뒤쪽에는 영문으로 ‘김정식’ ‘조상섭’ 등이라고 적힌 묘지석들이 풀 속에 방치돼 있었다.

◇윤봉길 의사 항일정신 깃든 루쉰공원=다행히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의거는 상하이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윤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루쉰공원에 설립한 ‘매헌 윤봉길 기념관’을 최근 리모델링해 개방했다. 새롭게 단장된 기념관 앞에는 윤 의사의 생애가 사진과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된 안내판이 서 있었다. 한국어와 중국어로 쓰여 있어 지나가던 중국인들도 발길을 멈추고 주의 깊게 읽곤 했다. 기념관 1층에는 의거 현장과 순국 당시 상황을 담은 신문기사, 영상 등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시청각 자료실이 있었다.

25세였던 윤 의사는 1932년 4월 이곳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식과 상해사변 승리축하식을 열던 일본군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의 의거로 일제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 7명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그해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총살당했다.

윤 의사의 의거는 침체돼 있던 임정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를 이끌던 장제스는 그의 의거를 두고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높게 평가하고, 임정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윤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정자와 기념비, 기념관이 있는 루쉰공원에는 지금도 한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안태호 상해한국인회 전 회장은 “상하이 한인들은 매년 4월 29일 의거 날짜에 맞춰 글짓기 대회 등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며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으로 젊은 나이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윤봉길 의사의 뜻을 한국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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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글·사진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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