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규 교수의 바이블 생명학] 아무것도 기쁠 것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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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된 ‘생명책’의 정확한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이다. 생명책은 그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이다.

평소 그 책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난 다음 심판대에 섰을 때 그 책은 진가를 발휘한다. 그 책에 이름이 있고 없음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다. 불행하게도 그 이름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죄가 확정되고 그 죄에 대한 벌이 선고된다. 둘째 사망이란 벌이 즉각 집행되어 지는 것이다.

그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하게 된 우리들의 이름은 당연히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데 한 번 기록된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사데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았다. 당시 그들이 행한 잘못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를 지금 우리들이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마도 사역을 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평판과 명성에 도취되었으리라. 이러한 추정의 근거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이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이름으로 대응하신 것이 아닐까.

이러한 추정이 옳다면 사데 교회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교회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도 비록 소수이지만 교회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중요시 거론되는 것을 별 거부감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과 사진이 큼지막하게 언론매체에 등장하고 유명세를 타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는 지도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누구였을까. 수신인은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였다. 당시 일곱 교회에는 대부분 지도자들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교회 지도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수신인으로 지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에 주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또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각 교회에 주신 편지의 말미에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에게 줄 상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상들은 이 땅에서 받을 것이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받을 상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 생명책 앞에 서 보자. 주님이 생명책을 펼쳐서 붓에 먹물을 찍어내 이름을 쓰면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지금, 주님의 그 기쁨이 오롯이 내 기쁨이 됨을 느낀다. 그렇다! 내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평생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이제 내 이름을 빛낼 일은 없다. 아니 생명책에 선명하게 기록된 내 이름이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 어린 양의 이름을 빛내는 일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김덕규 <동아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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