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사랑은 짧고 질투는 길다 기사의 사진
“행복하세요.” “축복해주세요.”

세상 사람이나 크리스천이나 이렇게 복을 구합니다. 복(福)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이죠. 크리스천에겐 그 의미가 좀 더 확대돼 영생의 복을 의미합니다. 행복이 능동태라면 축복은 수동태에 가깝습니다. 축복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겁니다. 인간의 의지대로 가져와 쓸 수 없다는 거죠.

우리는 축복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가 무수한 축복을 주고받죠. 그러다 보니 굉장히 기복적 단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축복은 예수 정병에게 하나님 복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 전하는 이들을 위한 격려인 거죠. 하지만 값싼 축복행위가 알사탕 나눠주듯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정작 각자의 삶이 행복하지 않더군요.

지난해부터 100년 전후 역사를 지닌 30여개 교회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한국 초기 역사 교회들이죠.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초기 교인은 순교도 불사했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 소설 ‘부활’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처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가페적 사랑에 빠진 이들이었죠. 네플류도프 공작은 성처녀 카추샤를 자신의 욕망을 위한 희생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에 모든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스스로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로 갑니다. 그는 복음서의 진리 속에서 부활의 길을 찾지요.

‘값싼 축복’을 구하지 마라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우리도 네플류도프와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에 당신께선 축복을 내리셨고요. 이것이 100여년 전 순수한 우리의 신앙이었습니다. 축복 받는 신앙이었죠.

한데 아쉽게도 제가 돌아본 많은 역사 교회가 선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들이 수십리 길 걸어서 제단을 쌓아 우리를 길렀는데 그 기도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사랑 아닌 다툼을 하고 있다는 거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 15:37∼39)

이러한 다툼이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다툰 후 바로 사역을 위해 떠날 수 있는 이들이었으니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툰 거죠.

요즘 한국교회는 재산권을 위해 싸웁니다. 세상 권세를 위해 편을 가릅니다. 이 싸움에 하나님을 끌어들여 서로 축복해 달라고 요구하죠. 신앙적 성숙을 이룬 역사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리권을 쥔 이들이 불복하는 이들을 책벌합니다. 그 속내를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구한다는 겁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시 34:19)라는 말씀을 자당 결속을 위한 축복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제가 돌아본 세 교회 중 한 교회가 유사한 형태의 분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대립 현장에서 그들은 흥분해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첫사랑 찾기를

“때릴 테면 때리세요.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말은 가난한 소년 안데르센이 어릴 적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주인에게 매 맞을 위기에 처하자 한 말입니다. 폭력의 불의에 하나님 이름으로 맞선 것입니다. 이 말에 밭주인은 용돈까지 주며 안데르센을 달래 보내죠. 사실 한국교회가 이랬습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권력 앞에, 물질 앞에 당당하게 맞서며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며 의를 구했습니다. 이러한 한국교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행복했죠.

오늘, 살풍경한 ‘자신들끼리의 축복 기도’ 모습이 분쟁 있는 교회 노상에서 벌어집니다. 첫사랑을 잃은 한국교회입니다. 사랑은 짧고 질투는 길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정희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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