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독서 메리트 제도라도 기사의 사진
윤한로 시인이 첫 시집 ‘메추라기 사랑노래’(시인동네)를 보내왔다. 윤 시인은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이 60의 가객이다. 데뷔 34년 만에 시집을 낸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승하 시인이 시나 문단과는 강 건너 마을 사람같이 살아가는 윤 시인에게 “형, 시 써놓은 것 없우?” 하니까 “조금은 있다”고 했다는 것. 한번 보여 달라고 했더니 무려 200편이 넘는 시 뭉치를 보여주더란다. 그중에서 60편만 가려낸 것이 이 시집이다.

윤 시인은 머리에 얹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쓴다. “새 쫓고 애 보고/꼴 베고 쇠죽 쓰던 아이들이// 새 쫓고 애 보고/꼴 베고 쇠죽 쓰던 마음들을// 순전히/새 쫓고 애 보고/꼴 베고 쇠죽 쓰던 말로다// 썼네. 삼십년 전/안동 시골학교 이오덕 선생님의 (…) 작은 책 // 거기서 시를 알았고/머리 허예 아직도 거기서 시를 배우네”라고. 20대 중반에 이름을 얻은 시인이 몇 권의 시집을 엮고도 남을 시편을 쓰는 동안 평생 내색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새 쫓고 애 보던 아이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을 만한 세월에 아직도 순전히 그 시절 그 아이들의 말로다 시를 쓰고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쯤 되면 ‘문학의 죽음’ 같은 말은 시장통의 좌판 위에 얹어놓은 ‘골라 골라’와 같이 때깔 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문학은 이렇게 자존하는데 논자들은 근·현대문학의 위대한 유산이 미처 소화되지도 않은 마당에 해는 이울고 문학은 죽었다며 문학을 시체안치실로 옮겨놓는다. 최근 만난 몇몇 문인들은 한결같이 문학은 죽었다며 작품을 써서는 빵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작품에만 매달려 작품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문학은 죽지 않는다. 문학의 죽음을 논하는 말들이 문학을 죽일 뿐이다. 작가는 써야 한다. 언제 누가 작품을 돈방석 위에서 썼다는 말인가.

얼마 전 셰익스피어의 희곡 몇 권을 읽었다. 번역된 문장 한 단락 한 단락이 기가 막히기도 하거니와 작품 전체에 흐르는 많은 것들 때문에 셰익스피어와 어떤 나라를 바꾼대도 싫다고 했다는 저들의 유치한 과장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고, 꼭 해보고 싶은 것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셰익스피어 전집 37권을 일독하는 것도 포함시키고 싶을 정도가 되었다.

세계의 대작가들이 20세기 위대한 문학작품 중 하나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든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율리시즈가 어렵다면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도 좋다. 이런 작품들이 우리 사회에 거의 소화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문화행정가들은 다른 곳에서 힘을 낭비하고 있고, 작가들은 손을 놓고 있다.

기억할 수 있다. 민주화를 이룩한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의제는 ‘공안통치’나 ‘사정당국’ 같은 말이다. 지금도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향후의 정국이 공안을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수십년째 남과 북은 거의 똑같은 문제로 싸우고 있고, 사회는 똑같은 진영 대립으로 갈등하고 있다. 감히 말한다. 이런 현상은 제대로 된 작품들이 소화되지 않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고, 이대로 두면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라고. 지금 문화계는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무용, 문학 등 어느 한 분야 가릴 것 없이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국제적으로 키워온 부산영화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다이제스트가 아니라 제대로 된 책을 읽도록 행정을 펼쳐야 한다. 하다못해 독서 메리트 제도 같은 것이라도 만들었으면 한다. 뛰어난 작품을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사회는 잘사는 사회가 될 수 없다.

임순만 논설고문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