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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김종헌] 한국적 근대의 거리, 정동

각종 문화재와 기념물 즐비한 정동거리… ‘정동야행’ 통해 선조들 꿈 되새겼으면

[청사초롱-김종헌] 한국적 근대의 거리, 정동 기사의 사진
오는 29일과 30일 서울 중구청 주관으로 ‘정동야행(貞洞夜行)’이라는 밤거리 축제가 진행된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앞서 구청의 모든 공무원들로 하여금 관내에 소재하는 역사문화공간들을 답사케 했다. 문화자산을 모르고 행정을 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중구청 내에 있는 기업의 CEO들을 대상으로 교육 및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동의 문화유산들을 어떻게 묶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 탄생한 프로그램이 ‘정동야행’이다. 그동안 문화재청 주관으로 ‘대한제국으로의 시간여행’과 문화유산국민신탁 주관으로 ‘다 같이 돌자 정동 한바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런 프로그램은 근대기 문화가 집약된 정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작년 12월 눈 내리는 밤에는 정동야회(貞洞夜會)라는 행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했던 것은 1883년 이전에 세워진 미국공사관(서울시유형문화재 제132호)을 비롯하여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영국공사관, 프랑스공사관 터, 독일공사관 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정동제일교회(사적 제256호), 성공회 서울대성당(서울시유형문화재 제35호), 구세군중앙본부(서울시기념물 제20호) 등 종교시설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다. 배재학당동관(서울시유형문화재 제16호)과 이화여고 심슨홀(등록문화재 3호) 등 교육시설도 있고, 경운궁 양이재(등록문화재 제267호) 구대법원 청사(등록문화재 제237호) 구 신아일보사(등록문화재 제402호) 구 국회의사당(등록문화재 제11호) 등도 있다. 그럼에도 정동거리는 덕수궁 돌담길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문화들의 경계 영역을 형성했던 정동거리는 항상 새로운 문화가 충돌하고 있었다. 정동거리는 각국 공사관 주변을 중심으로 범세계적 근대문화가 용광로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장소였다. 이에 따라 정동은 조선과 대한제국을 넘어서서 근대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근대사를 압축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정동의 중심은 덕수궁(사적 제124호)이다. 덕수궁 안에 세워졌던 구성헌과 돈덕전 그리고 석조전은 그 안에 있었던 중화전, 즉조전, 석어당, 준명당과 어우러져 독특한 한국 근대 궁궐의 경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 덕수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정동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정동은 서양인의 거리가 아니다. 서양의 다른 거리에서 정동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의 서양문화가 적응해온 거리다. 정동의 정체성은 한국문화와 서양문화가 충돌하여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한국적 근대의 거리다. 정동에서 매일 매일의 일상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이곳에서는 전혀 예기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새로운 문화가 역동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정동으로 들어온 1885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불과 20여년 사이에 정동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허나 정동거리의 중심인물은 서양인들이 아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세계 변화의 동태를 파악하려 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이었다. 비록 130여년 전 이들이 가졌던 꿈들이 일본에 의해 차갑게 식어가긴 했지만 이들의 꿈은 미국 워싱턴이나 보스턴, 뉴욕을 향하고 있었고, 영국 런던이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해 있었다. 어쩌면 당시 이들의 꿈이 되살아나 우리 젊은이들에 의해 ‘한류’라는 이름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정동야행’을 통해 130여년 전 정동 젊은이들의 꿈을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날 벌어지는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김종헌(배재대 교수·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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