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크리스천 유학생들, 일제 심장부서 기도하고 독립선언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4) 일본 (上) 2·8독립선언 산실, 재일본한국YMCA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크리스천 유학생들, 일제 심장부서 기도하고 독립선언 기사의 사진
일본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재일본한국YMCA 회관 9층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입구에 조선청년독립단 11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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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경화를 주도하고 있는 아베 총리 관저, 일왕 거처인 왕궁,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등을 지나 한적한 거리로 접어들자 짙은 노란색 10층 건물이 나타났다. 일본 정치의 1번지인 도쿄 지요다구에 자리 잡은 재일본한국YMCA 회관이다. 현관에선 약 2m 높이의 ‘조선독립선언 1919 2·8 기념비’가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기념비는 1919년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2·8독립선언의 산실이 바로 이곳임을 묵묵히 증거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생들, YMCA 중심으로 독립운동=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한국YMCA)는 1906년 도쿄에서 창립됐다. 3년 전 서울에서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에 이어 한국YMCA 역사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단체다. 원래 회관 건물은 야스쿠니 신사 근처에 있었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돼 1929년 이곳에 다시 건립됐다. 지금 건물은 1980년 모금운동을 벌여 새로 지은 것이다.

9층으로 올라가자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나왔다. 재일본한국YMCA는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2008년 5월 이 자료실을 개관했다. 입구에는 2·8독립선언을 이끌었던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의 흑백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자료실에는 2·8독립운동의 전개과정과 3·1운동에 미친 영향, 관동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 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회관은 당시로는 드물게 조선인 소유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조선인 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평소 친목회와 웅변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2·8독립선언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였다. 그해 12월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신문에는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미국에서 일고 있는 조선독립운동 움직임이 작은 기사로 소개됐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 기사에 주목했다. 이 무렵 서울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고 돌아온 와세다대 유학생 이광수를 통해 중국과 조선의 독립운동 준비 상황도 전해졌다.

도쿄의 유학생들은 세계 각지의 동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때가 임박했다고 확신했다. 191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웅변대회 등의 명목으로 자주 회합을 가졌다. 대회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1월 6일 웅변대회에선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독립을 열망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유학생들은 실행위원 10명을 선출했고 이들은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다. 춘원 이광수가 선언서를 작성한 뒤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했고, 학생들은 YMCA에서 빌린 등사기를 사용해 일주일 동안 선언서를 인쇄됐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는데, 이 중 김상덕 송계백 윤창석 백관수 김도연 서춘 등 6명이 크리스천이었다. 송계백은 YMCA학관에 다니면서 신앙을 갖게 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김상덕은 서울 경신중에 다니면서 신앙을 갖게 됐고 교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백관수는 1915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YMCA 간사로도 일했다. 김도연은 일본 유학생들의 모임인 기독교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윤창석은 1906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에 의해 세워진 영명학교를 다니며 신앙을 가졌다. 후일 변절했지만 서춘도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신앙인이었다.

재일본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다즈케 가즈히사 실장은 “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사실상 주도했다”면서 “당시 기독교는 나라를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조선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3·1운동을 견인한 2·8독립선언=1919년 2월 8일 오전 개회 중인 일본의 제국의회, 각국 대사관, 내외신문사 앞으로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선언서가 우편으로 발송됐다. 오후 2시 눈이 내리는 가운데 YMCA 회관 1층 강당에는 400∼600명의 유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우회 예산총회’를 가장해 열린 집회였지만 사회자는 조선청년독립단 결성대회 개막을 선언했다. 윤창석이 기도를 드린 뒤 백관수가 독립선언서,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일본 경찰이 제지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서명자 11명 가운데 9명과 다수의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를 피한 학생들은 제2, 제3의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2·8독립선언 발표 전달인 1월 중순, 송계백은 헝겊에 쓴 선언서를 양복 속에 감쪽같이 기워 넣은 뒤 조선으로 들어와 민족대표들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전해진 2·8독립선언서는 3·1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3·1운동은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등 조선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정신적 원천이 됐다.

◇독립운동 지지했던 크리스천 일본인=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에선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일본인 크리스천의 활약상도 만날 수 있다. 요시노 사쿠조(1878∼1933) 도쿄제국대 교수는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였다. 그는 일본 내 조선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를 일본조합교회 아래에 편입시키려던 일본 정부의 기도를 무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크리스천이었던 요시노 교수는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를 맡고 있던 백남훈과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친구였다. 그는 일본인 대부분이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당시 신앙적 양심에 따라 조선인의 목소리를 대변한 보기 드문 일본인이었다.

재일한국YMCA 이사장 이청길 목사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도쿄로 유학 온 청년 학도들이 불우한 시대를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와 소망을 심어줬던 선교기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유공자협회, 주일대사관, 재일대한민국민단, 한·일 기독교단체 등이 참여해 매년 2·8독립선언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면서 “재일한국YMCA가 96년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면서 국가적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 입장에서도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전했다.

도쿄=글·사진 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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