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칼럼] ‘희망퇴직’에 희망이 없다 기사의 사진
날씨는 한여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폭염이 한창인데 고용시장에는 한겨울 삭풍이 불고 있다.

인력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직장인들을 거리로 내몬다. 증권과 보험업종을 중심으로 작년부터 수만명을 밀어낸 감원 칼날이 올 들어서도 무뎌지지 않았다. 연초부터 가시화된 인력 감축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을 필두로 SK그룹 계열사, 국민은행 등 취업준비생들이 꿈에서라도 원할만 한 양질의 직장에서 많게는 한 곳당 1000명이 넘는 대대적인 퇴출이 이뤄졌다.

주로 ‘희망퇴직’이란 미명으로 단행되는 인력 구조조정에 ‘희망’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희망퇴직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은 ‘희망’보다는 ‘퇴직’에 방점이 찍혔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강제가 아닌 자발적 지원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자발적 희망퇴직이라면서 대담하게도 퇴직 규모를 사전에 확정 발표하는 기업이 적지 않은 것이 대한민국 기업 생태계의 현실이다. 웹툰 드라마 ‘미생’에서 오상식 차장은 계약직 장그래에게 ‘직장은 버티면 이긴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버티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버틸 수 있기는 한가. 같은 드라마의 또 다른 대사 ‘직장은 전쟁터, 나가면 지옥’은 남아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밀려나서도 안 된다는 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러나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전쟁터는 차라리 낫다. 아군과 적군이 구별이라도 되지만 직장은 아군이 적군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붙잡히면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 대접 해주는 전쟁터보다 더 비인간적인 경험이 수시로 목도되는 직장도 적지않다.

20일 전쯤 됐나. KBS TV 특집프로그램에 등장한 조선업체 근로자의 말이 가슴을 쳤다. 조선업 불황에 따른 감원의 실태를 묻는 취재진에게 그는 “얼마 전 퇴사한 선배의 말이 ‘버티면 지옥, 나오면 저승’이라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무작정 버티고 있자니 회사가 못 살게 굴어 지옥 같은 생활이 이어질 것이고, 그만두자니 이미 죽어 저승에 가는 형편과 마찬가지란 얘기다.

대개의 경우 회사에서 밀려나면 한동안 무기력에 빠진다. 대기업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한다. 마음을 추스르고 재취업을 해보려 하지만 40∼50대인 이들을 선뜻 받아들이는 곳은 별로 없다. 한동안 놀다가 창업으로 눈을 돌리면 길은 뻔하다. 개인 서비스업에 진출한 후 결국 다수는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재기가 쉽지 않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왜 기업은 걸핏하면 사람을 자를까. 교과서적인 의미의 인력 구조조정은 경영효율이 목적이다. 자금사정이 악화됐거나 대형 인수합병 등으로 잉여인력이 발생하는 경우 등이 단행 시기라 할 수 있다. 우리 기업 사정과는 상당히 다르다. 2014년 기준 국내 10대 그룹 상장사 96곳의 사내유보금은 503조원이었다. 전년보다 38조원 늘었다. 국내 대기업은 정부 한해 예산을 웃도는 엄청난 여윳돈을 갖고 있다. ‘저성장과 불황의 장기화’ ‘불확실성의 증대’ 등의 이유로 사람을 자르기에는 논리가 군색하다.

굳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운할 것도 없다. 대기업들은 폭발적 성장 이면에 세제, 금융, 사회간접자본, 연구개발 등 정부의 엄청난 특혜와 국민들의 적극적인 성원이 큰 몫을 차지했음을 자각해야 한다. 기업 경영상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불가피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은 각고의 고심 끝에 나온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곳간에 천문학적인 돈을 쌓아두고도 쉽게 감원을 일삼는 기업은 결국 국민들의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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