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친구들과 조선독립 강조…’ 민족 위해 고난의 길 걷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 - (15) 일본 中 크리스천 민족시인 윤동주 日 형무소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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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릿쿄대에 다니던 윤동주(뒷줄 오른쪽)가 1942년 여름방학 때 귀향해 송몽규(앞줄 가운데) 등 가족들과 찍은 사진. 윤동주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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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릿쿄대학. 정문으로 들어서자 양 옆으로 아름다운 히말라야전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100년 가까이 된 전나무는 릿쿄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안쪽으로는 담쟁이 넝쿨로 덮인 고풍스런 벽돌건물과 아담하고 정갈한 정원들이 이어졌다. 릿쿄대는 여러모로 서울 신촌 연세대 캠퍼스를 떠올리게 했다.

릿쿄대는 미국 성공회에서 파송한 채닝 윌리엄스 선교사가 1874년 설립한 미션스쿨이다. 크리스천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에 다닌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 6개월 정도 머물렀지만 ‘쉽게 씨워진 시’ ‘봄’ 등 다섯 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쉽게 씨워진 시’에 등장하는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의 육첩방은 그가 머물던 릿쿄대 근처 다다미 6장 크기의 방을 가리킨다.

◇전시체제 릿쿄대서 주옥같은 시 남겨=히말라야전나무 뒤쪽으로는 갈색 벽돌로 지어진 본관인 ‘모리스관’이 보였다. ‘쉽게 씨워진 시’의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는 구절에 나오는 강의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동주는 재학시절 이곳 모리스관에서 동양철학 수업을 들었다. 본관 왼쪽으로는 윤동주가 공부했던 구 도서관 건물이 있었다. 올해부터 전시관으로 바뀌었는데 첫 전시행사가 ‘윤동주 시인 서거 70주기 자료전시회’였다. 본관 오른쪽 건물은 채플관이었다. 윤동주도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다카마츠 다카하루 교목과 상담하곤 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1942년 4월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하며 미국과 전면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내부적으로는 전시체제를 강화했다. 릿쿄대 군사훈련 담당이었던 군국주의자 이이지마 신지 육군 대령은 학생들에게 단발령을 내렸고 비판적인 학생들은 군대로 보내버렸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 유학생들을 격려하며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다카마츠 교목 덕이었다.

윤동주는 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로 시를 써서 조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편지를 받은 친구 중 한 사람인 강처중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해방될 때까지 이 시들을 조심스럽게 보관했다. 덕분에 릿쿄대 마크가 들어간 편지지에 적힌 다섯 편의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씨워진 시’ ‘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릿쿄대에선 지금도 윤동주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발족된 ‘윤동주 고향을 찾는 모임’은 2007년 릿쿄대에서 윤동주 추모식과 시 낭독회를 가졌다. 릿쿄대 문학부는 2008∼2009년 ‘시인 윤동주와 함께 하는 도쿄 모임’을 두 차례 개최했다. 이를 계기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가 생겼다. 이 모임의 제안으로 릿쿄대는 2010년부터 한국 유학생에게 ‘윤동주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윤동주 삶에 녹아 있는 ‘기독교 정신’=윤동주의 삶에선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다. 증조부 윤재옥은 1886년 온 가족을 이끌고 중국 북간도로 이주해 1910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조부였던 윤하현은 교회 장로로 마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윤동주가 태어날 때 북간도 명동촌 명동학교 교사였던 부친 윤영석은 중국 베이징에서 유학하고 온 크리스천 지식인이었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윤동주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생을 마감한 평생 동지였다. 같은 집에 살았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유아세례를 받고 함께 주일학교에 다녔다. 외삼촌인 독립운동가 김약연도 윤동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직접 맹자 등의 고전과 성서 등을 가르쳤다.

윤동주는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확립했다. 그가 다닌 중국 룽징(龍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연희전문 등은 모두 미션스쿨이었다. 1938년 4월 입학한 연희전문 문과에서는 4년간 재학하면서 매년 성서 과목을 수강했다. 이 시절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캠퍼스 안에 있던 협성교회에 다니며 선교사 부인이 인도하는 영어성경 공부에 참여했다.

윤동주는 교회학교와 여름 성경학교에서 교사로도 봉사했다. 그의 시 ‘십자가’ ‘팔복’ ‘눈 감고 간다’ ‘새벽이 올 때까지’ 등에는 식민지 청년의 신앙고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립운동’하다 일본에서 순국=윤동주는 1942년 10월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도시샤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고종사촌 송몽규가 교토제국대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동주는 송몽규의 하숙집과 가까운 곳에 살며 그와 자주 어울렸다. 하지만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한 경력 때문에 일본 경찰로부터 집중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1943년 7월 10일 송몽규를 체포했고 14일에는 윤동주와 그의 친구도 검거했다.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982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공개된 일본 교토 재판소의 판결문에는 윤동주가 ‘친구들과 어울려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부추겼으며 조선어 폐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문화를 유지시키려는 불온한 사상과 행동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윤동주는 체포된 지 260일 만인 1944년 3월 31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됐다. 이곳에 갇혀 있다 1945년 2월 16일 일본군의 생체실험을 받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운명했다. 만 27세 짧은 생애였다.

유시경 릿쿄대 한국사무소 소장은 “일본에 왜 왔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던 윤동주는 결국 공부보다 독립운동을 선택했다”며 “‘쉽게 씨워진 시’와 ‘십자가’ 등의 작품에서 나라 잃은 슬픔과 이를 극복하려는 신앙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 소장은 “조국의 독립뿐 아니라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염원했던 윤동주의 시와 그의 정신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간직해야 할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도쿄=글·사진 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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