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소백산은 철쭉판 別有天地非人間 기사의 사진
소백산 야생화. 사진 왼쪽 위부터 큰앵초, 산앵도나무꽃, 물참대, 감자난초, 벌깨덩굴, 은방울꽃, 쥐오줌풀, 점나도나물. 단양=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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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하면 겨울철 모진 칼바람부터 생각난다. 몇 년 전 2월 말인데도 주 능선에서 체감기온이 거의 영하 30도에 달했다. 겨울산행 때마다 이곳에선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늦봄의 화려한 철쭉터널을 통과하고, 여름철 야생화 천국을 접하고 나면 이렇게 장엄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산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작은 백두산’이라는 소백산의 별칭은 부드럽지만 백두산의 기상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충북 단양의 철쭉제가 끝난 다음날인 지난 1일 소백산 주 능선을 찾았다. 죽령에서 제2연화봉(1357m)까지 시멘트 포장길을 거쳐 국립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388m)에 이르면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푸르고 부드러운 주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제1연화봉(1394m)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등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은 다른 높은 산들과 달리 비슷한 높이의 연봉들에 푸른 초원과 관목 숲이 어우러져 있다. “하도 가물어서 철쭉 군락이 별로 예쁘지 않아요. 개화 타이밍은 단양군이 이번에 정확하게 맞혔지만 아쉽네요.” 동행한 소백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 직원의 말이다.

연화봉에서 비로봉 가는 길에 온갖 새 울음이 귓전을 울린다. 소백산 북부사무소 이용욱씨는 “천연기념물인 두견이를 비롯해 뻐꾸기, 벙어리뻐꾸기, 검은등뻐꾸기, 매사촌 등의 귀한 새들이 모두 소백산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쥐오줌풀, 광대수염, 큰앵초, 미나리냉이, 눈개승마, 벌깨덩굴 등의 꽃을 만났다. 쉽게 보기는 어려운 고산지대 식물인 연영초와 ‘숲의 요정’ 감자난초도 일행을 반겼다. 앙증맞은 애기나리, 졸방제비꽃, 두루미꽃도 보인다. 고광나무의 흰 꽃은 짙은 향기로 코를 즐겁게 한다. 오감을 일깨우는 산길이다.

철쭉꽃이 일부 졌고, 많지 않은 꽃잎들도 상당수 타들어가긴 했지만, 녹색 절경 속 분홍빛 게릴라들의 도열은 강렬하면서도 몽환적이다. 퇴계 이황은 이곳의 철쭉터널을 지나면서 “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고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 절기에 지리산, 소백산, 태백산 철쭉을 보러 다닌 게 십수번이지만, 제대로 절정을 포착했던 것은 지리산 정령치∼바래봉 구간에서 딱 한 번뿐이다. 철쭉 군락의 아름다움은 꽃에 한창 물이 올랐을 때 색채의 강렬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일본 철쭉에 반했던 강희안, 김창흡, 신경준 등 조선시대 선비들은 꽃의 색이 짙을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철쭉, 진달래, 산철쭉, 왜철쭉 순으로 꽃의 색이 진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무 하나에 핀 꽃과 군락의 꽃 대궐을 볼 때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철쭉제를 하면서 등산로 초입에 개량종 산철쭉이나 영산홍, 왜철쭉 등을 잔뜩 심어놓는다. 크기도, 색깔도 중구난방인 이들 꽃은 ‘천상의 화원’에 핀 철쭉과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소백산 관리사무소 김혜정씨는 “철쭉 군락은 해발 1000m 넘는 곳에 있는데 지금도 하이힐이나 구두를 신고 철쭉 구경하러 오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이름과는 정반대로 산철쭉은 산(높은 곳)에 없고, 철쭉이 산에 있다. 산수유가 산에 없고, 생강나무가 산에 있는 것과 흡사하다.

소백산은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동쪽 해안선 편으로 치우쳐 뻗어오다가 반도의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길목에 앉아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에서 매서운 칼바람도, 빼어난 조망도 비롯됐다. 정상인 비로봉(1439m) 주변 4만5000여평에 산재해 있는 200∼400년생 주목 군락 1500여 그루는 천연기념물 244호로 지정돼 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곳 주목은 3만여 그루를 헤아렸다고 한다.

아고산지대(1300∼1900m)에는 키 작은 나무(관목)들이 다양한 야생화들과 사이좋게 살아간다. 꽃개회나무, 노린재나무, 오미자나무, 구슬댕댕이, 아구장조팝나무 등이 꽃이나 꽃망울을 드러내고 있다. 관목들 사이로 ‘5월에 피는 백합’ 은방울꽃도 보였다. 흰색의 작은 종 모양인 은방울꽃은 서양에서 ‘성모 마리아의 눈물’에서 피어난 꽃으로 통한다. 그래서 이 꽃으로 만든 꽃다발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종소리 대신 향긋한 냄새가 주변에 퍼진다.

천상의 화원은 긴 겨울 눈 속에서도 모든 에너지를 모아뒀다가 이렇듯 봄과 여름에 사이좋게 차례대로 꽃을 피워내며 아고산지대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지상에서 갈등과 다툼을 이어가는 인간세상과 너무 대조적이다. 복사꽃이 아닌 철쭉꽃판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백)이라고 할까. 소백산이 설악산, 지리산과 달리 이런 저런 개발 광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라는 점이 큰 다행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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