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日 유학 구국 청년들 결집…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6) 일본 下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배출한 동경교회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日 유학 구국 청년들 결집…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다 기사의 사진
1909년 동경교회 제1대 목사로 부임한 한석진 목사(앞줄 왼쪽 첫 번째)의 평양신학교 1회 졸업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코리아타운이 있는 일본 도쿄의 상업중심지 신주쿠구. 중심가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외곽 주택가인 와카미야초 지역은 한적했다.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니 단아한 외관의 흰색 3층 건물이 나왔다.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김해규 목사)였다. 입구는 3m 높이의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그 위에는 흰색 십자가가 높이 솟아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교회 초기역사를 장식했던 교인들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이들 빛바랜 사진은 동경교회의 107년 역사를 웅변하는 듯했다.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생들의 예배처소로 창립=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망국의 운명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한국교회는 암담한 현실을 신앙으로 극복하자는 ‘소망’을 제시했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평양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많은 청년들이 국권회복의 꿈을 가슴에 품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 중에는 신앙심 깊은 기독청년들이 많았다.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이들은 1906년 창립된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한국YMCA) 회관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동경교회의 씨앗은 이렇게 뿌려졌다.

1908년 3월 평양에서 예수교서원을 운영하던 정익로 장로가 옥편을 인쇄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예수교서원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신민회와 연결된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다. 정 장로는 도쿄에 머무는 동안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김정식 총무와 백남훈 조만식 등의 유학생들을 만났다. 그 무렵 주일마다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기도회 형태로 예배를 드리던 유학생 10여명은 일본에 조선인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정 장로에게 요청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그해 동경교회 설립을 결의하고 이듬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를 도쿄로 파송했다. 한 목사는 1909년 10월 안수집사격인 ‘영수’ 직분에 김정식 조만식 오순형을 세우고 김현수 장원배 장혜순 백남훈을 집사로 임명해 교회를 조직했다.

◇독립운동가의 산실인 ‘어머니’ 교회=동경교회 설립의 주역들은 기독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정식은 독립협회 지도자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르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한 주역이다. 조만식은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기독교를 받아들인 교인으로, 일본 유학 후 조국에서 물산장려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백남훈은 김정식의 뒤를 이어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제2대 총무를 맡았다.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예배를 드리던 동경교회는 초기 유학생 교인들이 장로교 출신이어서 장로교회로 출발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에는 감리교 출신 유학생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도쿄에 감리교회도 세워달라고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교파를 따지지 말고 연합교회를 세워 함께 예배를 드리자는 의견에 따라 1911년부터 교회 명칭을 ‘재일본도쿄조선예수교연합교회’로 바꾸고 연합예배를 드렸다. 초교파 연합기구인 재한복음주의연합공의회에서 주관해 장로교와 감리교 목회자들을 번갈아 파송했다. 해방 때까지 감리교와 장로교가 2년 혹은 3년마다 목회자를 교대로 파송한 것은 지금도 본이 되는 에큐메니컬 동역 사례로 꼽힌다.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소망을 안고 일본 유학을 선택한 다수의 동경교회 성도들은 독립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백남훈 윤창석 최팔용 전영택 주요한 백남규 등은 모두 동경교회를 섬기던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이뤄낸 ‘2·8 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돼 세계만방에 조선 독립의 의지를 알렸다.

동경교회 김해규 목사는 “동경교회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동포들에게 희망과 안식의 장을 제공했다”며 “100년 넘는 역사를 통해 조국과 동포를 위해 일한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을 비롯해 홍난파 안익태 오윤태 이종성 등으로 이어지는 지도자들을 배출했다”고 말했다.

◇관동대지진 때 예배처소 잃어=2·8독립선언 후 일본 경찰은 동경교회와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동경교회 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배와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923년 9월 1일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도쿄 시내에 가옥 수가 63만 가구였는데 그 중 40만 가구가 붕괴되고 전소되는 대재난이었다.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건물도 붕괴돼 동경교회는 하루아침에 예배처소를 잃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흉흉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당시 일본인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6000여명에 달했다. 동경교회도 많은 성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동경교회는 다시 예배를 드릴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일본 메이지학원대학 신학부 교실, 센다가야 임시교회당 등으로 예배처소를 옮겼다. 이듬해부터는 중국기독청년회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다 1929년 새로 건축한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인교회 연합해 재출범, 재일교포 차별에 항거=일본의 야욕이 부른 태평양전쟁은 또다시 고난을 몰고 왔다. 도쿄 시내에 미군 폭격이 이어지면서 많은 가옥과 건물이 파괴됐다. 당시 조선인교회 7곳 중 4곳이 파괴됐다. 전쟁의 참화 끝에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1946년 2월 10일 7개의 한인교회가 동경교회를 중심으로 연합해 ‘재일본조선기독교 동경교회’로 재탄생했다. 매년 2월 둘째 주일을 창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1950년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로 개명했다. 1942년 제14대 오윤태 목사가 부임하면서 시작한 예배당 건축은 9년 만인 1951년 완료됐다. 1979년 현재 건물을 새로 지었다.

동경교회는 해방 후에도 일본에 만연한 한국인 차별에 저항하며 재일동포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1980년대 다른 한인교회들과 연합해 외국인 지문날인에 반대하는 ‘지문날인 철폐운동’을 벌였고, 1992년 특별영주권자에 대한 지문날인제도 철폐를 이끌어냈다. 일본교회와도 굳건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선교를 위해 힘을 쏟았고 5개 교회를 개척했다.

재일본한국YMCA 이사장 이청길 목사는 “동경교회는 2·8독립선언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도 성도들을 보호했다”면서 “광복 후에도 한국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하는 등 100여년 역사 동안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진정한 선교정신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목록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