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저절로 진화되는 불은 없다 기사의 사진
#장면1. “병원에선 유행성 결막염 정도로 판단했다가 하루 사이에 환자가 우르르 몰려들고 사망자가 나오면서 이 난리가 난 거고. 지금은 환자가 몇 명인지 정확히 파악도 안 되는 지경이야.” “더 무서운 건 이게 무슨 병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보건 당국은 물론 질병관리본부조차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장면2. “대통령의 권한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선제적 조처로써 화양시 통행을 한시적으로 제한하고… 정부는 짧은 시간 내에 위기를 타개하고 상황을 통제하여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양 시민은 동요하지 마시고 일상생활을….”

원인불명의 인수(人獸)공통전염병이 창궐한 수도권 도시 화양은 폐쇄된다. 언론통제가 시작되고 인터넷과 통신은 차단된다. 정부의 미봉책 속에 화양은 공포에 휩싸이며 결국 생지옥으로 변해간다. 사투를 벌이던 의료진과 119대원 상당수도 죽음을 비껴가지 못한다. 소설가 정유정의 작품 ‘28’은 잔인하고 섬뜩하다. 2년 전 이맘때 출간된 이후 메르스 사태로 재조명받는 이 작품은 물론 현실과는 다르지만 전염병 확산의 상황 전개가 지금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정부와 국민이 유리되면 공동체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도 단적으로 그려진다.

‘발생 초기에 신속하게 격리하고 방역 대책을 썼다면 이렇듯 걷잡을 수 없이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소설 속 이야기는 메르스 대응에 실패한 박근혜정부와 오버랩된다. 첫 감염자 발생 이후 메르스 병원 명단을 공개하기 전까지 20일간 정부가 보여준 위기관리 능력은 낙제점이다. 책상머리 매뉴얼을 과신하다 초기 방역망이 뚫려 골든타임을 놓친 무능력 정부, 정보를 독점하면서 괴담 유포는 엄단하겠으니 각자도생하라던 무개념 정부, 뒷북대응만 하면서도 무조건 안심하라던 무책임 정부…. 국민 불신과 혼란만 초래했다.

초반에 ‘후진국 메르스’를 가볍게 본 게 패착이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구멍 난 방역은 인정하면서 기본방향이 실패한 건 아니라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의 궤변은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감염병 위기단계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국가 이미지 때문이라는 그의 답변은 국민을 분노케 한다. 말만 하면 반대로 된다는 ‘문형표의 저주’라는 말도 나돈다는데 이번 사태의 책임을 결코 면하기 어렵다.

이미 대한민국 이미지는 실추됐다. 메르스 진원지인 중동 국가들마저 한국 여행을 자제·주의하라고 권고할 정도다. 특히 우리나라 덕분에 메르스 발생국 3위로 내려앉은 아랍에미리트 정부는 경기도를 ‘여행 주의’ 지역으로 지정했는데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게 지난해 에볼라가 창궐한 서아프리카 국가 이후 처음이라니 이런 망신도 없다. 우리 금융의 후진성을 두고 우간다 수준이라는 개탄이 나오는데, 이제 방역 분야도 후진국 수준으로 전락한 꼴이다.

뒤늦게나마 최경환 국무총리 직무대행이 메르스와의 전쟁 사령탑에 오르면서 대응 체계가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국민들도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발병 지역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어 우려스럽다. 최대 고비인 이번 주말 이후 어떤 국면으로 전개될지 예측불허다. 진정 기미를 보일 것으로 기대하는 정부가 여전히 미덥지 않다. 섣부른 전망은 금물이다.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한다. 어이없고 대책 없는 낙관에 대해 소설 속 등장인물은 말한다. “저절로 진화되는 불도 있던가. 태울 것이 남아 있는 한 불은 스스로 수그러들지 않는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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