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일본통 김수한 前 국회의장 “과거사도 중요하지만 미래 지향적 관계 구축해야” 기사의 사진
김수한 전 국회의장 사무실 벽에는 일왕 및 전·현직 총리들과 찍은 기념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그는 교착된 한·일 관계를 아쉬워하며 “두 나라 정부가 나무 대신 숲을 보면서 긴 안목으로 좋은 우방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오는 22일은 한·일 국교정상화(수교)를 위한 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꼭 50년 되는 날이다. 35년의 식민시대 구원(舊怨)을 청산하고 우호협력을 다짐한 지 무려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하지만 양국은 여전히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꾸준히 이어오던 정상회담마저 수년째 중단된 상태다. 그 배경에는 기본조약이 과거사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해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수교 50주년을 맞아 한일친선협회와 한일의원연맹 활동 등을 통해 오랫동안 일본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교류해 온 김수한 전 국회의장을 만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해법을 들어봤다. 김 전 의장은 미수(米壽)를 목전에 둔 고령임에도 한·일 문제에 관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한·일 현인회의'를 갖고 한·일 관계 개선 방향을 모색했으며, 일본 측 대표로 참석한 모리 요시로 전 총리 등과 청와대로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해 양국 정상회담 개최를 건의하기도 했다. 인터뷰는 지난 8일 여의도 김 전 의장 사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했으며, 15일 전화로 보충 취재했다.

-한국과 일본이 수교협정을 맺은 지 50년이 지났는데 현재의 양국 관계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말 그대로 교착이고, 경색이지요. 지난 3월 제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면담했을 때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에 한·일 관계를 ‘맹방에서 가까운 이웃’으로 고친 부분을 복원하라고 했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군요. 그것이 양국의 현주소라고 봅니다. 50주년이 매우 의미 있는 해여서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베 정권이 지속되는 한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계 악화는 아무래도 아베 정권의 책임이 크다고 봐야겠지요.

“따지고 보면 그렇지요. 사실 이명박정부 이전 한국과 일본 정상은 회담을 하기 위해 수없이 오갔습니다. 당일치기 방문도 했잖습니까. 아베 총리가 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와 식민지 지배에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철회하려는 듯한 언행을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과거 일본의 한국 침탈에 대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아베 총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사에 너무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란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도 이른바 ‘사과 피곤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과거사에 집착하기보다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역사적으로 엄청난 구원이 있는데도 국익을 위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혈맹이 돼 있지 않습니까. 사과 피곤론이 더 확산되면 일본 책임론이 희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한·일 관계가 끊임없이 삐걱대는 이유는 한·일 기본조약에 미비점이 많기 때문 아닌가요. 우리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실책이라고 봐야겠지요.

“수교회담 때 저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습니다. 윤보선 장택상 함석헌 선생 등이 공동의장이었지요. 정부와 엄청나게 각을 세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수교를 하는 게 옳았습니다. 돈은 100원도 받지 말고 사죄 탑 하나 반듯하게 세우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오기였어요. 그때 우리 경제는 양철공장이라도 만들어 근대화를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8억 달러였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유·무상 5억 달러를 빼앗아 온 셈입니다. 그 돈으로 제철공장 세우고 고속도로 닦은 건 사실 아닙니까. 액수가 적다는 비판을 많이 하지만 나는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도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조차 인정받지 못한 것은 잘못 아닌가요.

“아쉽기는 했지만 원칙론만 내세우면 끝이 없습니다. 임진왜란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이 현재 한·일 정상회담 개최의 가장 큰 걸림돌인데요.

“기본적으로 일본은 수교 때 모든 게 다 청산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인도적 문제이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얼마 살아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일본이 성의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지요. 일본의 양식 있는 정치인과 학자, 건강한 시민들이 나서고 있어 기대해 봅니다.”



-독도영유권 문제도 큰 걸림돌입니다. 좋은 해법이 없을까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냥 두는 게 가장 좋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영원히 주장할 겁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떼어가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지요. 그들이 억지주장을 해봤자 국제적으로 지지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것은 실책이라고 봐야겠군요.

“구태여 갈 필요는 없었다고 봅니다. 그것 때문에 독도에 관심도 없던 많은 일본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독도를 자기네 소속이라고 주장하는 시마네현의 독도 홍보 예산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외교적으로 플러스된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합니까.

“야스쿠니 신사는 우리나라 국립현충원과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국립묘지가 아니라 혼령을 모신 사찰 비슷한 곳입니다. 국민 전체가 참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전범이 합사돼 국제적으로 시빗거리가 된 것을 많은 일본인은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과 별도로 국립묘지를 만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합니다. 그래야 외국 손님이 와도 참배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양국 역사에 비춰볼 때 근본적으로 우방이 될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양국이 교류를 시작한 것은 2000년이 넘습니다. 길고 긴 역사 가운데 불편했던 시기는 아무리 늘려 잡아도 100년이 채 안 됩니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가 최악의 시기였지요. 200년 동안 이어졌던 조선통신사 파견은 의미가 각별합니다.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통신사가 다녀간 흔적은 지금도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습니다. 나무를 보는 대신 숲을 보면서 긴 안목으로 좋은 우방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와 현안을 분리 대응하는 쪽으로 선회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좋은 기류 변화라고 봅니다. 양국 관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이 보자는 의미겠지요. 아베 총리가 우경화의 길을 가고 있지만 일본 정계의 보스급 중진 의원들과 지식인들은 절대 한쪽으로 쏠리지 않습니다. 다방면적인 대화와 교류를 통해 교착 국면을 풀어야지요.”



-어쨌든 양국이 정상회담을 재개해야 관계 정상화가 되는 것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서로 양보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지요. 우리는 광복 70주년, 일본엔 종전 70주년인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합니다. 너무 장기화되면 회복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과거에 비하면 양국의 물밑대화 통로가 거의 사라졌다는 느낌입니다.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양국 간에 문제가 생기면 저와 JP(김종필)가 일본으로 건너가 절충을 시도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노력들을 덜 하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요즘 우리 국회의원들은 일본어가 잘 안 돼 일본 의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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