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크리스천 주도로 해외 한인 독립운동 구심점 역할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7) 하와이 (上)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크리스천 주도로 해외 한인 독립운동 구심점 역할 기사의 사진
한국독립문화원 방문에 동행한 명한식 전 하와이상록수회장이 국민회가 사용하던 깃발을 들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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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내비게이션에 ‘호놀룰루 루크 애비뉴(Rooke Ave) 2756’을 입력한 뒤 도착한 곳은 완만한 산비탈에 있는 마을의 꼭대기였다. 차에서 내리자 태극기가 걸려 있는 아담한 크기의 2층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하와이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해 세운 한국독립문화원이었다.

“저것 보세요. 태극기가 낡다 못해 끝이 찢어졌어요. 태극기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태극기를 여러 장 사다 놓았다가 자주 교체를 할 것이지.”

안내를 위해 함께 방문한 명한식(76) 전 하와이상록수회 회장은 혀를 차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명 전 회장은 독립운동가 성제 명이항 선생의 손자다.

◇쓸쓸히 방치된 하와이 한국독립문화원=한국독립문화원은 평소 문이 닫혀 있다. 문을 열어준 관리자는 한국인이 아닌 독일인이었다. 1년 전만 해도 한국인 여성이 관리했지만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독립문화원 건물 소유자의 지인으로 알려진 이 독일인이 열쇠를 갖고 있다가 이따금 방문객이 찾아오면 문을 열어준다. 명 전 회장은 “이전엔 방문객들이 기부금을 내던 모금함이 입구에 있었는데 도둑맞아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한국의 경민학원이 2001년 사들여 한국독립문화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경민학원은 “운영비가 부족해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는 “개인 소유다”라며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사실상 방치돼 왔다.

◇크리스천 중심의 항일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대한인국민회는 일제강점기 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한 단체다. 장인환 전명운 선생 등이 일제 통감부의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권총으로 저격한 이듬해인 1909년 미국에 살던 교민들이 국민회를 조직했다.

국민회는 미국 본토에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에 하와이지방총회를 두고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대동보국회와 합쳐 대한인국민회가 됐다.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21년 그곳에서 나와 동지회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하와이 교민들의 독립운동은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회원들이 주도했다.

하와이의 두 단체 회원들은 대부분 크리스천이었다. 하와이 한인사회 자체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인천 내리교회가 1903년 전도사를 파송해 설립한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와 이곳에서 1918년 분립한 한인기독교회가 하와이 교민사회의 두 축이었다.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기록사진에는 애국 열기가 가득=한국독립문화원 안으로 들어서자 2층 전시실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 위에는 ‘하와이 독립운동 전시관’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기역 자로 꺾여 있는 계단의 중간 벽면에 붙은 ‘머리글’ 액자에는 ‘한국독립문화원이 서는 바로 이 자리는 해외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대한인국민회가 보존해 온 유일한 장소’라고 적혀 있었다.

제1전시장에선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회관’(1914∼1947)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한인국민회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이들의 단순한 친목모임에서 시작됐다. 친목 모임 10여개가 1907년 합성협회로 합쳐졌고 이후 안창호 선생 등이 미국 본토에서 만든 공립협회와 함께 1909년 2월 국민회가 됐다가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와 통합하며 대한인국민회가 됐다.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창립회원’ 사진에는 박상하 정원명(초대회장) 강용수(서기) 안원규(재무) 홍인표(서기) 이내수(부회장) 승룡환(총무)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 앞에 서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이승만의 국민회 입회증서’가 붙어 있었다. 이 증서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합쳐진 후인 3월 12일 입회했다.

제3전시장에는 대한인국민회가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음을 보여주는 ‘의연금 증서’가 전시돼 있었다. 증서 아래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한 독립운동 의연금증서’(1919)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인도 양성했다. 박용만 선생이 이를 주도했는데, 그는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전시장에는 박 선생의 모습과 훈련장면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반면 이 전 대통령은 군인 양성보다 정치와 경제를 중시했다. 이 전 대통령이 대한인국민회에서 나와 동지회를 만든 것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동지회는 합자회사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해 목재 판매 및 목탄제조사업을 벌였지만 파산했다. 1924년 경제적 자립과 독립운동 후원을 위해 7만 달러를 모아 ‘동지촌’을 건설했지만 역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동지회 관련 사진은 제2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개인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동지회 회관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동지식산회사의 주식증서’와 목탄제조사업을 벌이기 위해 만들었던 ‘하와이 섬 올라아 지방에 있는 숯 가마터’ 사진도 전시돼 있었다.

◇크리스천 여성 교민들도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하와이 한인 교회를 통해 양성 평등 의식과 조국 독립의 열망을 갖게 된 여성 크리스천 교민들도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은 1908년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1909년 기록에는 신명부인회 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낸 사실이 확인된다. 신명부인회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도 냈다. 이들 여성 교민은 주로 옷과 떡을 만들어 팔아 독립자금을 조성했다. 이를 보여주는 기록과 유물들도 한국독립문화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은 “하와이 교민 독립운동사에선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면서 “당시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고 모금한 이들 중에 여성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와이 이민 100년’ ‘한인기독교회’ 등의 책을 쓴 그는 “아쉽게도 독립운동자금을 낸 사람들을 기록한 명단에는 ‘누구 부인’ ‘누구 모친’ 식으로 적혀 있어 실제 이름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전체 명단 중 40% 정도는 여성이었다”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러 다닌 ‘징수위원’도 대부분 여성이었다”고 설명했다.

호놀룰루=글·사진 전병선 기자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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