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메르스보다 더 위험한 것 기사의 사진
능소화가 곱게 피어나는 6월 중순에 우리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그렇지 않아도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삶의 토대를 소리 없이 허물고 있다. 친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도 흔쾌하지 않고, 상을 당한 이들을 조문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몸이 아파도 선뜻 병원에 갈 생각이 들지 않고, 입원한 이들에 대한 위문도 미뤄두곤 한다. 모임이 취소되는 일도 빈번하다. 다중이 모인 곳에 가급적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을 경계의 눈빛으로 보게 되는 이 현실이야말로 가인의 후예들이 이주하여 살던 에덴의 동쪽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었다 해도 그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안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메르스의 전파 경로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숨겼다. ‘괜히 국민들을 불안하게 할 것 없다’, ‘관련된 병원에 피해를 줄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그 말에 설득당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사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후에야, 그것도 마지못해, 감염 경로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다.

책임 있는 당국자들 석고대죄할 때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자기들의 태만과 무능에 대해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국민 앞에 엎드리는 일이 아닐까? 별일 아니라는 듯 메르스 의심환자가 다녀간 음식점에 언론사 기자들을 대동하고 가서 국밥 한 그릇 먹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병원 스태프들과 만나는 것으로 사태를 호도하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관광객들이 오지 않아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체부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뭔가. 관광하러 왔다가 메르스에 감염되면 돈으로 보상해주겠다고? 우리 문명의 토대가 무엇인지 이 발언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인가?

대통령은 며칠 휴교했다가 다시 수업을 시작한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 가서 손을 잘 씻고, 몇 가지 건강 수칙을 잘 지키면 메르스는 전혀 염려할 것 없다고 말했다. 메르스를 중동독감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메르스로 죽어간 사람들, 투병하고 있는 사람들, 감염이 의심되어 자가 격리돼 있는 이들은 개인위생에 철저하지 못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무슬림에 대한 신의 진노’는 망발

코호트 격리병동에서 죽어가는 아내와 작별인사조차 할 수 없어서 그곳에 격리된 채 환자들을 돌보던 간호사들을 통해 작별의 편지를 대독하게 한 남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38년을 함께 산 아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의 손을 잡아줄 수도 없고, 함께 지내온 세월이 참 고마웠다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운명처럼 다가온 고통의 시간은 그 가족의 모든 기억을 아프게 절단내고 있다. 그 아픔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잊는다.

메르스가 동성애자들과 무슬림들에 대한 신의 진노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한다. 한마디로 망발이다. 이것은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렇게 편협하지 않다.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신을 동원하는 일이야말로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고통 받는 그들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계시지 않는가.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것이야말로 참 사람의 길이 아닌가. 고통 받는 사람 곁에서는 차마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다. 그 기본을 잃으면 종교는 신의 무덤이 되고 만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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