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50년] ‘영토-과거사’ 싸고 뿌리깊은 갈등의 악순환 기사의 사진
한국과 일본은 수교 후 50년간 안보 및 경제협력은 물론 ‘한류’ 열풍 등 문화적 교류를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 및 과거사 인식 문제가 반세기 내내 양국관계의 ‘복병’으로 작용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됐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한·일 관계=50년 전인 1965년 6월 22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외무상은 도쿄에서 한일협정에 정식 서명했다. 6·25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10월 예비교섭을 시작한 지 13년8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양국관계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1970년 일본 ‘적군파’ 조직원들이 일으킨 ‘요도호 사건’을 우리 정부가 원만히 해결하면서 한·일은 안보를 중심으로 밀접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과 1975년 ‘문세광 사건’ 등 한·일이 서로 한 차례씩 ‘폭탄’을 주고받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양국 갈등의 영원한 ‘불씨’들=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요인은 영토와 과거사 문제다. 두 요소가 안정적으로 관리될 때는 양국관계에도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일본 우익 정객의 망언이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전두환정권 시절이던 1982년 일본 정부는 고교 역사교과서에서 일제의 침략을 ‘진출’, 3·1운동을 ‘폭동’으로 기술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1990년 초반 김영삼정부 시절에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되면서 양국관계가 회복되는 듯했지만, 한 일본 정객의 망언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발언하면서 다시 냉각기를 겪었다.

김대중정부 시절의 한·일 관계는 양호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 침략을 특정한 사죄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류’ 열풍의 단초가 마련된 것도 이때다. 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등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망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양국관계는 매번 부침을 거듭했다.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는 냉탕 일변도=양국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건 이명박정부 시기다. 2011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당시 총리와 정면충돌한 데 이어 이듬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하고 ‘일왕 사죄’ 발언까지 내놓으면서 양국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양국관계는 회복될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상국가화’를 모토로 우경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론’으로 맞받으면서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대(對)중국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관계 개선이 절실한 미국의 압력 및 아베 총리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회담이 성사되는 등 중·일 관계 개선 조짐은 한·일 관계 회복의 또 다른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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