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50년] 경제·고도성장 기반됐지만… 日 과거사 ‘면죄부’로 이용 기사의 사진
50년 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한일협정이 그 전제가 됐다. 협정은 20세기 초반부터 35년 동안 식민지배를 행했던 일본과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식민지배와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우리 국민에 대해 일본이 행했던 각종 강제동원에 대한 청구권이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맺어진 한·일 청구권은 1960∼70년대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의 기반이 됐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면죄부였을 뿐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지금까지도 일본은 조선인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그런 사안은 한일협정으로 다 끝났다”는 논리를 들이밀며 회피하기 일쑤다.

1964년 3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협정 체결 방침을 밝히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이른바 ‘6·3사태’였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듬해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 체결된 협정의 정식 명칭은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 협정(‘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협정 체결 과정에서 양국 사이에 가장 첨예하게 맞섰던 대목은 일제 병점 과정에서 체결됐던 과거 조약들의 무효화 문제였다. 식민지배 자체의 불법성 여부와 직결된 이 사안을 놓고 양국은 한·일 기본관계조약 2조를 통해 ‘(과거 조약이) 이미 무효’라고 명시하는 데서 타협했다.

우리 측은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명시하려 했지만, 일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협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조약 무효라는 명목이 대신 들어간 것이다. 일본이 아직도 식민지 통치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도 바로 한일협정의 이 대목 때문이기도 하다.

‘청구권’이라는 개념도 향후 한·일 양국 간 과거사 갈등의 씨앗이 됐다.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금’이 아니라 재산상 관계를 정리하는 ‘청구권 자금’으로 식민피해 청산이 이뤄져서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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