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50년] 진정한 포용과 반성… 佛·獨의 ‘벽’ 그렇게 무너졌다 기사의 사진
1963년 1월 22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콘라트 아데나워(왼쪽) 당시 서독 총리와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양국 우호조약인 엘리제 조약에 서명한 후 포옹하고 있다. 독일 슈피겔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187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왕국의 독일 통일을 막기 위해 시작한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고,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됐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겼다.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 독일은 이전까지 프랑스와 영국이 지배하던 유럽의 권력 구도를 깨뜨렸다. 갈등의 서막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두 국가의 갈등은 계속됐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오스트리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이탈리아와 함께 프랑스·영국 등이 손잡은 연합군과 싸웠다. 유럽은 폐허가 됐고, 70년에 걸친 갈등에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도 악화될 대로 악화됐다. 독일과 프랑스는 그야말로 앙숙이었다. 1958년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적국’인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 전까지는.

1954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목적으로 한 파리강화조약은 전범국인 독일(당시 서독)의 주권을 회복시켰지만 전쟁 당시 반대편 진영에 있던 국가들과의 심리적 화해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드골 전 대통령과 아데나워 전 총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없이 유럽의 화해란 불가능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대승적 화해’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1963년 1월 양국 간 포괄적 관계발전을 위한 조약이 체결됐다.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체결된 ‘엘리제 조약’이었다. 이를 위해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두 사람은 40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고, 15차례나 만났다.

엘리제 조약은 외교·과학·문화·환경·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협력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조약은 재단을 통한 청소년 교류, 연료순환·원자로 등 핵분야 공동연구와 우주항공산업 기술 교류, 환경협의회 및 문화협의회 설치, 공동 문화 방송채널 설립 등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조약의 내용은 실제 결과물로 나타났다.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을 벌이던 두 나라는 1989년 합동여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1987년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양국 군사협력증진 방안의 하나로 독일·프랑스 합동육군여단을 제의한 데 따른 것이다. 1991년에는 양국이 공동 출자해 문화예술채널인 아르테 TV와 아르테 라디오를 설립했다. 양국의 정상을 포함해 모든 각료가 참석하는 합동 내각회의도 파리와 베를린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엘리제 조약은 유럽연합(EU) 단일화폐인 유로를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도 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2006년 두 나라의 공동 역사교과서가 출간됐다는 점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서로에 대한 적대감 대신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취지다. 2003년 1월 엘리제 조약 체결 40주년을 맞아 독일과 프랑스 청소년 의회에 참석한 영국 청소년 대표가 공동역사교과서 출간을 제의했고 양국 정부는 검토 끝에 출간을 결정했다. 두 나라는 이 교과서를 고등학교 공식 교과서로 채택했다.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로 갈등을 빚었던 폴란드와도 공동교과서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유럽의 화해는 한국과 일본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보여준다. 침략당하고도 먼저 손을 내민 프랑스와 전쟁범죄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한 독일의 노력은 두 나라를 훗날 EU를 이끄는 주축으로 만들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관련기사 보기]
▶ 엔저에 정치·사회적 악재 겹쳐… ‘역대 최악’
▶ 우리 정부, 日측에 먼저 의견 타진…日 부정 반응 보이다 20일 선회
▶“양국 정상, 대표라는 책임감 갖고 마주봐야 한다”
▶ 朴-아베, 수교 50돌 리셉션 교차 참석
▶ 朴·아베의 ‘축사’… 정상회담 가시권 들어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