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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한인 이민교회, 동포들 애환 달래고 독립운동도 앞장 서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 - (18) 하와이 下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와 한인기독교회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한인 이민교회, 동포들 애환 달래고 독립운동도 앞장 서 기사의 사진
하와이 호놀룰루시 케에아우모쿠 스트리트에 있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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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호놀룰루시 케에아우모쿠 스트리트에 있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김낙인 목사)는 높이 솟은 지붕과 첨탑이 눈에 띄는 미국식 목조 건물이었다. 교회 바로 옆 주차장에는 높이 10m가 넘는 야자수가 서너 그루 서 있었다. 평온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처음으로 세운 교회다. 가난한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의 애환과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미주 독립운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교회는 창립 95주년인 1998년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유리예술가’ 엘렌 맨델바움은 이국땅에 사는 이방인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한인들의 십자가를 예배당 안 유리창에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했다. 예배당 옆 선교회관 1층 복도에는 112년 교회 역사와 한인들의 이민사를 담은 사진들을 전시했다.

◇하와이 이민과 첫 이민교회 설립=1850년대 사탕수수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하와이는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처음에 중국인과 일본인을 데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농장주들에게 위협이 됐다. 노동조건을 개선해달라며 집단파업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국인이었다.

초대 주한미국공사인 호러스 알렌은 한국 정부와 하와이 농장주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다. 고종의 윤허도 받았다. 그래도 지원자가 많지 않자 인천 내리감리교회의 조지 존스 목사가 설득에 나섰다.

1902년 12월 22일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항을 떠났다. 내리감리교회 교인도 50여명 포함됐다. 이 중 35명은 중간기착지인 일본에서 한 차례, 호놀룰루 입항 직전 선상에서 또 한 차례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귀국했고 86명만 상륙했다. 1903년 1월 13일이었다. 하와이 이민은 계속됐다. 이듬해인 1903년 한 해 동안에만 1133명이 더 이주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40여개의 농장으로 흩어져 일했다. 이들은 각 농장에서 기도회를 열었는데, 내리감리교회 성도 등 이민자들 상당수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다.

1903년 11월 3일 호놀룰루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거나 숙박업소를 경영하는 한인들이 통역이었던 안정수 내리감리교회 권사와 우병길을 대표로 뽑고 감리교회 감리사 피어슨과 의논해 ‘한인감리교선교회’를 조직했다. 첫 예배는 11월 10일 드렸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이를 창립예배로 기록하고 있다.

첫 담임은 1904년 2월 18일 홍승하 전도사가 맡았다. 한인감리교선교회는 1905년 4월 1일 한인감리교회로 승격됐다. 홍 전도사는 풍토병을 얻어 1년 만에 귀국하고 민찬호 전도사가 제2대 담임이 됐다.

한인감리교회는 한인 이민자들 삶의 중심이었다. 교회는 가족과 떨어져 외로워하고 힘든 생활로 낙심하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다.

커뮤니케이션과 교육도 담당했다. 1904년 11월부터 월간 한글 교회소식지 ‘포와한인교보’(한인교회보의 전신), 1913년 9월부터 월간 ‘태평양잡지’를 발간했다. 1906년 9월에는 ‘한인기숙학교’를 세워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교인들은 1903년 8월 동포들을 보호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정치단체 ‘신민회’를 조직했다. 민찬호 전도사는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회단체인 ‘공진회’를 조직했다. 이들에겐 목회가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이 목회였다.

◇교회 분열과 한인기독교회 설립=1914년 한인감리교회 내에 갈등이 생겼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13년 초 하와이에 정착했는데, 그는 하와이에 오자마자 감리사 와드먼의 추천으로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맡았고 한인감리교회 업무에도 관여했다.

1914년 와드먼 감독 대신 프라이 감독이 감리사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라이 감독은 이 전 대통령에게 교회 업무에서 손을 떼고 학교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교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못하게 하는 등 간섭도 심해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이에 반발해 한인의 독자적인 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한인여학원’을 세웠다. 한인기숙학교 교장은 그만뒀다.

이 전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한인감리교회에서도 나와 어느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교회를 세우자며 자신을 따르던 감리교회 교인 30명과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18년 12월 23일 이들이 ‘한인기독교회’를 창립했다. 한인기독교회는 미국 회중교회의 제도를 따르면서 평신도 위주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됐다. 한인기독교회는 호놀룰루뿐만 아니라 힐로, 미국 본토인 LA에도 설립됐다. 1938년에는 한인기독교회 세례교인 수가 1263명에 달했다.

이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시작한 한인기독교회는 3·1운동 이후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민찬호 장붕 이종관 홍치범 목사와 안현경 이원순 김유순 등은 대한인국민회 혹은 동지회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하와이 교민들의 신앙 터전으로=한인감리교회는 제일한인감리교회(1916년), 그리스도감리교회(1965년)를 거쳐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1968년)로 이름을 바꾸며 성장해왔다. 현재의 예배당을 신축할 무렵에는 재적 교인이 1000여명에 이르렀다.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는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이곳 예배당은 이 전 대통령이 1938년 4월 24일 자라나는 다음세대들이 조국을 잊지 않게 하자며 서울 광화문을 본떠 세웠다. 교회 안팎에는 이 전 대통령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교회 정면 오른쪽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한인기독교회 창설하신 어른 우남 리승만 박사 상’이라고 새겨진 이 전 대통령의 전신 동상이 서 있었다. 교회 옆 별도건물에 마련된 ‘독립기념관’에는 이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타자기, 독립기금 장부, 이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초기 교인들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한인기독교회 성도로서 이 전 대통령을 사모하는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승모회’ 대표를 역임한 김창원 ㈜앰코 회장은 “이 전 대통령은 우리도 헌금을 하는데 예배당에서 왜 한국말을 못 가르치게 하고 정치 얘기도 못하게 하느냐고 말하곤 했다”며 “우리도 독립교회가 필요하다면서 만든 교회가 바로 한인기독교회”라고 말했다.

호놀룰루=글·사진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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