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야마구치에서 만난 ‘아베이즘’ 기사의 사진
오랜 역사를 지닌 아시아와 유럽에서 이웃한 나라들은 상대를 깔보는 욕을 적어도 하나쯤 갖고 있다. 우리가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 있듯이 중국과 일본에도 한국인을 비하할 때 쓰는 욕이 있다. 수천 년을 이웃해 살면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물고 뜯는 일이 허다했으니 그런 욕이 생긴 건 당연하다 하겠다.

과거사 문제로 악화일로를 걷던 한·일 관계가 지난 22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나온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메시지를 계기로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해 안에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있으나 속단은 금물이다. 두 정상의 양국 기념행사 교차 방문은 수교 50주년 기념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보여주기 식 이벤트 성격이 강하다. 두 정상 모두 미래를 얘기했지만 박 대통령은 ‘과거사 치유를 통한 미래’에 방점을 찍은 반면, 아베 총리는 ‘미래 협력’에 초점을 맞췄다. 좁히기 쉽지 않은 간극이다.

지난 주말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한·일 관계가 예전 같지 않게 냉랭한 데다 국내 메르스 사태로 입국 심사가 까다롭지 않을까 지레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다. 어떤 나라에선 한국인을 마치 범죄자 취급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여서 일일이 발열 검사를 하는 등 법석을 떨 줄 알았었다. 그러나 일본 공항 관계자들은 오히려 우리가 의아해할 정도로 차분하게 한국인을 대했다.

우리 일행이 찾은 혼슈 최남단에 위치한 야마구치(山口)현은 한국인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유명한 관광지도 별로 없고, 한국인에겐 결코 기분 좋을 수 없는 유적들이 적지 않아서다(김종필 전 총리가 한일의원연맹회장 시절 시모노세키에 세운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만 빼고). 현대 일본 우익의 모태가 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본고장이 야마구치다. 메이지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요시다 쇼인을 기리는 야마구치현 하기(萩)시의 쇼인신사 입구에 ‘메이지유신 탄생지’라고 쓰인 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요시다는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부르짖은 장본인이다. 그는 저서 ‘유수록(幽囚錄)’에서 조선과 만주, 대만, 필리핀, 오키나와, 캄차카 등의 일본 영유화를 주장했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의 문하생이다. 이토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쇼인신사 인근 이토가 젊은 시절을 보낸 집에는 이토 동상이 서 있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여기에선 ‘근대화를 앞당긴 위인’으로 대접받는 걸 보면서 ‘과거사 문제 해결이 쉽지 않겠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현 아베 총리 또한 이곳 출신이다. 그의 노골적인 우경화 노선은 출신 배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베 총리는 태어날 때부터 요시다와 이토의 DNA를 갖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 그가 지난 22일 일본을 방문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내 선거구가 조선통신사가 왕래한 야마구치현”이라고 말했다. 야마구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과거 한·일 교류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에서 조선 침략의 음모가 시작됐으니 말이다. 이곳을 지역구로 둔 아베 총리가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야마구치현 곳곳에 산재한 제국주의 시대 관련 기념관이나 유적을 둘러보는 마음은 불편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본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여행을 마치면서 우리 일행이 그랬듯 아베 총리 등 일본 우익 인사들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나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는다면 한국의 정서를 헤아리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해봤다. 과거사 문제는 서로의 입장에서 봐야 풀린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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