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한인단체 통합 美洲 임시정부 역할… 교회가 뒷받침했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9) 美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와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한인단체 통합 美洲 임시정부 역할… 교회가 뒷받침했다 기사의 사진
미국 로스앤젤레스 제퍼슨가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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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LA)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웨스트제퍼슨 불러바드를 따라 서쪽으로 40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십자가가 높이 달린 교회 건물이 나온다. 미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한인장로교회인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박일영 목사)’다. 교회 왼쪽으로는 오래된 빨간색 단층 건물이 있고 다시 왼쪽으로 주차장 건너 흰색 단층 건물이 서 있다. 주차장 가까이 다가가자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입구’란 작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흰색 건물이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임시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옛 본부다. 1909년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이 창립했을 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었지만 주변에 다리가 건설되면서 193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1992년 LA시 의회에서 최초의 한국인 사적지(548호)로 지정됐다.

기념관을 관리·운영하는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의 윤효신 부이사장은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1978년 이 건물을 사들여 보존하다 2003년 복원해 독립운동 유품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325㎡ 면적에 4개 전시실로 이뤄진 기념관에는 초기 이민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유품,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를 발행했던 윤전기 등이 전시돼 있다.

◇미주 임시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인국민회=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 동양인 한 사람이 미국인에게 권총을 겨눈 뒤 방아쇠를 당겼다. 불발이었다. 동양인은 미국인에게 달려들어 권총으로 얼굴을 치고 달아났다. 미국인은 동양인을 쫓아가기 위해 대여섯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이 도망치던 동양인의 어깨를 관통했다. 다시 두 발의 총성이 이어졌고 미국인이 쓰러졌다. 이 미국인은 ‘일본의 보호가 한국에 유익하며 한국인들도 이를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였다. 처음 스티븐스를 공격한 동양인은 한국인 전명운, 두 번째로 공격한 이는 장인환이었다.

이날 사건은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으로 타전됐다. 소식을 들은 재미 한인들은 항일 애국열에 불탔다. 한인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의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모금을 했다. 당시 20여개로 난립했던 한인 단체들은 통합에 나섰다. 1908년 10월 23일 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통합을 결의하고 이듬해 2월 1일 국민회를 조직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대동보국회도 참여하면서 조직을 확대 개편해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에 지방총회를 설립했다.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가 맡았다. 각 지방총회 아래에 다시 10여개의 지방회를 뒀다. 대한인국민회는 1945년 광복 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신한민보를 발간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미국 정부에 한인과 일본인을 다르게 대우해 달라고 요청해 한인 관련 일은 한인 사회와 직접 교섭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미국 네브래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 멕시코에 숭무학교,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도 양성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안창호가 숨진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인국민회를 주도했고 그는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전 대통령이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대한인국민회는 순수 교민단체로 바뀌었고 1989년 5월 1일 자진 해산했다.

◇독립운동 거점,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1906년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사무엘 모펫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LA를 방문했다. 그는 LA 한인들을 위한 이민교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방화중 전도사를 만나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미국 북장로교 LA노회의 허락을 얻어 그해 5월 10일 LA 벙커힐의 한 주택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LA노회가 파견한 프리차드 목사가 집례했으며 방화중 민찬호 조성환 전도사 등 17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후 김중수 목사가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됐다.

교회는 LA 한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친교 시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본부가 웨스트제퍼슨 불러바드로 옮겨오자 교회는 이듬해 총회본부 바로 옆의 대지를 구입해 성전을 세웠다. 당시 400여명이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 출신인 민찬호는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해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창설에 앞장섰고 이 전 대통령과 함께 동지회도 창립했다.

교회는 광복 후에도 한동안 대한인국민회와 공동으로 3·1절 기념식 등을 주최했으며 6·25전쟁 때는 조국을 위해 기도하며 고아 돕기에 나섰다. 1983년 450여석인 현재의 예배당을 봉헌했다. 교회와 기념관 사이에 있는 빨간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성전으로 현재는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유물 보전 해법은=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는 6336점의 문건과 402건의 도서 유물 등이 보관돼 있다. 원래 전시하던 유물 외에 2003년 건물 복원 공사 당시 천정에서 발견한 장인환과 전명운 재판지원 문건,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외교 및 재정모집 문건 등이 포함돼 있다. 기념관을 운영하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는 유물 보존 문제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전문 수장고가 없어 유물 중 30%가량이 일부 훼손됐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유물들을 한국으로 보내자는 의견과 미국의 인근 대학에 맡겼다가 수장고가 있는 박물관을 세운 후 다시 가져오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수년째 조율이 안 되고 있다.

윤 부이사장은 기념관에서 차로 2분여 거리에 있는 로즈데일 공원묘지로도 안내했다. 이곳에는 초기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과 독립유공자 등 200여명이 잠들어 있다. 그는 “LA를 찾는 많은 한인들이 대한인국민회 기념관과 이곳 묘지를 방문해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면서 “귀한 유물들을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이 하루빨리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글·사진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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