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백두대간과 교차하는 구룡령 옛길 기사의 사진
구룡령 옛길의 금강송. 양양=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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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은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다. ‘강원도 속의 강원도’ ‘알짜 강원도’인 홍천군에서도 내면은 ‘오지 중의 오지’에 해당된다. 십수년 전 내면 삼봉휴양림에 묵으러 가다가 춘천에 있는 친구에게 “휴양림으로 놀러오라”고 제안했다가 “거기가 어디라고, 춘천 아니라 홍천 읍내에서 출발해도 3시간 걸린다”는 핀잔을 들었다. 어느 해 여름 밤 삼봉휴양림에서 평생 봤을 별의 절반 이상을 본 것 같았다. 하늘 반, 별 반이었다. 홍천군과 양양군의 경계인 구룡령 가는 길은 그런 추억들을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달 21일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56번 국도에 접어든다. 산과 산을 넘어 창촌 삼거리에서 양양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봉약수와 삼봉휴양림이 있다.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황동규 시인은 “세상이 고장 난 시계처럼 움직이면” 이곳에 들어가 살겠다고 했다. “떠돌이 쉬는 곳/ 찬 물에 계속 뜨거운 머리 식히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열목어가 마지막 와서 몸과 마음 묻는 곳.”(‘삼봉약수’)

길이 고도를 더 높이기 시작하면서 급커브를 그린다. 56번 국도 구룡령 구간의 정상은 해발 1013m. 백두대간 방문자센터 맞은편에 구룡령 옛길로 가는 입구가 있다. 여기에서 백두대간 능선 1.5㎞를 걸어가면 옛길 고개마루(1089m)에 닿는다. 보통 여기서 홍천이나 양양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가지만, 양양군 서면 갈천리 마을회관에서부터 올라가는 길(2.7㎞)을 택했다. 이 길은 명승 제29호로 지정됐다. 길 명승은 전국에 4곳뿐이다. 현지주민들이 잊혀졌던 옛길을 복원한 희귀한 사례다. 계곡을 건너니 초입부터 금강송이 나타났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이 벌목됐지만, 100∼200년 된 금강송들이 곳곳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중 한 그루는 둘레가 270㎝, 높이가 25m, 나이가 180세라고 안내판에 명기돼 있다.

구룡령 옛길은 양양, 속초, 고성의 숱한 서민들이 건어물을 지고 홍천으로 넘어가 곡식과 바꿔 왔던 통로였다. 지게꾼과 가마꾼, 그리고 심마니와 약초꾼들도 이 길을 다녔다. 험준한 백두대간으로 갈라져 있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고갯길들 가운데 구룡령 옛길이 운두령 (1089m)과 같은 최고 높이다. 양반과 선비들은 한양에 갈 때 비교적 낮은 한계령(1004)과 대관령(832)을 넘어간 반면 서민들은 주로 구룡령을 넘었다고 한다.

비탈길이어도 경사를 최대한 누인 길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은 옛 사람들의 지혜가 쌓인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노새와 조랑말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던 장면까지도 떠오른다. 1992년 포장된 56번 국도를 따라 갈천리에서 홍천군 내면 명개리까지는 약 20㎞에 이르지만, 순하고 아늑한 옛길로 가면 오히려 6.2㎞에 불과하다. 포장도로는 1908년 일본이 목재와 철광석 등 자원 수탈 목적으로 개설한 비포장도로였다. 차도가 살짝 옆으로 비켜간 덕분에 구룡령 옛길은 영서와 영동을 잇는 옛길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다.

23일에는 구룡령부터 백두대간 탐방로와 옛길 정상을 거쳐 명개리로 향했다. 정상 4거리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원시림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터리풀, 금강제비꽃, 물봉선, 동자꽃, 벌깨덩굴, 투구꽃 등이 보였다. 동행한 숲길체험지도사 남상수씨는 “갈천리 쪽이 양의 코스라면 명개리 쪽은 음의 코스”라며 “각각 목본과 초본이 우점한다”고 설명했다. 10분쯤 걸어가자 물소리가 들린다. 홍천 구간이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어서 양양 구간보다 식생이 더 풍부하고 숲이 더 울창하다.

백두대간 종주꾼들 사이에서는 “구룡령을 넘지 않았으면 백두대간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한다. 오대산 자락의 두로봉에서 응복산∼구룡령∼조침령∼점봉산∼설악산 한계령까지 구간(58.4㎞)은 백두대간 능선 종주에서 체력소모가 큰 코스 중 하나다. 백두대간 등산객들은 키보다 30㎝ 이상 높게 꾸린 배낭과 텐트를 지고 빠르게 이동한다. 남씨는 “주변 경관도 감상하면서 천천히 산행을 즐기면 좋은데 대다수 백두대간꾼들이 말로는 이에 수긍하면서도 산에만 들면 100m 경주하듯이 내달린다”고 말했다.

험준했을 구룡령 옛길을 무수한 사연이 담긴 발걸음으로 순하게 다듬은 선조들, 옛길 복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마을 주민들, 남씨처럼 지친 도시생활과 난치병을 떨쳐버리고 노후를 보내고자 열목어처럼 이곳에 깃든 사람들. 알록달록한 등산복과 많은 장비를 갖추고 관광버스를 대절해 몰려 왔다가 산을 ‘치고 올라가고’, 휘젓고 다니는 일부 백두대간꾼들이 넉넉하고 여유 있게 순한 옛길을 걷는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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