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서재필 “일본의 한국 겁탈, 하나님에 대한 선전포고”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20) 美 동부 (上) 필라델피아 독립운동 발자취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서재필 “일본의 한국 겁탈, 하나님에 대한 선전포고” 기사의 사진
주미 한국대사관 워싱턴총영사관 앞에 2008년 세워진 서재필 동상. 서재필은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한인 최초로 의학박사가 돼 미국 사회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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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다 죽은 백성일 줄 알았습니다. 살아있는 백성인 것을 알았고 이런 백성은 반드시 자유독립을 하고 말 것으로 믿었습니다.” 189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 ‘독립협회’ 설립자이자 최초의 민영 일간지 ‘독립신문’ 발행인이었던 서재필(1864∼1951)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조국 개화와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그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미국 독립운동 발상지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 열어=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서재필기념관 앞에는 잘 정돈된 푸른 잔디밭이 있었다. 그가 1925년부터 마지막까지 살던 집이다. 서재필기념재단 최현태 회장의 안내로 기념관 내부를 둘러봤다. 조선말 개화의 선각자, 일제시대 미주의 독립운동가, 건국 초기 민족의 지도자였던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재필은 고종 재위 때인 1882년 과거 합격자 23명 중 최연소였다. 그는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했다. 개화파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중국어 통역관 오경석 등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했다. 서재필은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서재필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서재필은 김옥균 소개로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로 요코하마에 있던 헨리 루미스 집에 머물며 영어를 배웠다.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가 가구점 전단지 붙이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자살 충동 앞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는 예수의 말에서 생명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영어성경을 읽으며 신앙을 갖게 됐다. 그는 존 홀렌백 장로의 도움으로 미 힐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현 조지워싱턴대)에서 의학 공부를 마쳤다. 1890년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조국에 돌아가 봉사하려면 시민권을 갖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894년 병원 개업 후 미 명문가 출신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재혼했다.

“재혼한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가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발행했죠. 이때 아펜젤러 선교사 부탁으로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개화사상을 강연했습니다. 이승만 박사도 제자입니다.” 최 회장이 독립신문 제본을 보며 설명했다. 불안정한 정세 속에 독립신문이 폐간되고 1898년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인쇄 및 문구사업을 했다.

1919년 3·1운동은 미주지역 동포신문 ‘신한민보’가 3월 13일자 호외로 널리 알렸다. 서재필은 워싱턴에 머물던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한인자유대회를 준비했다. 미국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필라델피아에서 재미동포와 유학생을 모아 대회를 열기로 했다.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명의로 초청장을 발송했다.

최 회장의 안내를 받아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던 시내 리틀극장(현 플레이앤플레이어스 극장)으로 갔다. 고풍스러운 외관의 극장 왼편에는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1919년 4월 14∼16일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모여서 제1차 한국의회(한인자유대회)를 열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 최 회장은 “당시 미주 한인 150여명이 모여 회의를 하고, 마지막 날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했어요. 서재필 박사의 진행으로 이승만 박사가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두 만세삼창을 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던 재외한인도 모금=서재필은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서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둔 한국통신부 설치를 제안했다. 그는 “한국인의 진실을 미국 대중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전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했고, 대한인국민회는 서재필을 대표로 승인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미주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서재필은 한국통신부 부장이었으나 공식적 여행경비 외에 급여를 전혀 받지 않았다. 또 유학생들이 발행하던 영문잡지를 인수해 ‘코리아 리뷰’를 매월 3000부씩 발행·보급했다.

길 안내를 하던 최 회장은 시내 한 교회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교회 보이시죠. 서재필 박사가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한인자유대회를 열고 코리아 리뷰를 발행할 수 있었던 건 지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 성삼위일체교회를 담임하던 플로이드 톰킨스 목사와 토마스 스미스 필라델피아 시장 등이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어요. 이들은 나중에 한국친우회 조직에도 적극 나섰죠.”

서재필은 1차 한인자유대회를 마친 뒤 4월 29일 백일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에게 한국친우회 설립을 제안했다. 한국친우회는 외국인으로 구성된 독립 지지 단체로 2년 만에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20여개가 조직됐다. 서재필은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동시에 지도하면서 미국인들에게 한국 상황을 알리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필라델피아 친우회장 톰킨스 목사는 1920년 5월 한국친우회 집회에서 미 대통령과 상원에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데하라 주미일본대사에게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재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지원 열기는 뜨거웠다. 1919년 재미 교포는 독립운동을 위한 성금으로 30만 달러를 모았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21년 9∼11월에만 모금액은 미주 1만1538달러, 하와이 7088달러, 멕시코 484달러, 쿠바 225달러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한민족독립운동사에서 “당시 1000여명에 불과한 미주 동포가 1만 달러, 사탕수수농장 등에서 일하던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이 700여 달러를 낸 것은 매우 경탄할 만한 정성”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한국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50센트에 불과 했다.

서재필의 독립운동은 신앙과 같았다. 그는 “일본이 한국에서와 같이 한 국가를 겁탈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표현했다. 서재필은 1947년 광복 후 1년여 동안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고국을 방문해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애썼다. 대통령 출마 요청을 받기도 했으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최 회장은 서재필기념비 앞에서 “대통령이 되길 원하는 이승만 박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75년 설립된 서재필기념재단은 의료원 사회복지센터 장학사업 등을 하고 있다. 필라델피아한인회 동포들은 그해 세운 기념비에서 ‘겨레의 선각자 서재필 박사의 뜻을 길이 받든다’고 썼다. 기념비는 한 신앙인의 도도한 삶을 전하는 듯 뜨거운 햇볕을 반사하고 있었다.필라델피아=글·사진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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