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동물의 왕국 vs 민주공화국 기사의 사진
여권의 ‘유승민 사태’가 억지로 봉합됐다.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통했다. 우두머리 눈 밖에 나자 무리들이 합세해 내쫓았다. 장장 14일간 야생의 생생한 장면들이 연속 방영된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는 시청자 입장에선 흥미로웠다. 배신, 분노, 갈등, 막말, 욕설, 내전, 축출 등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었다. 장면 이해를 돕고자 간혹 야권 내레이터도 등장했다.

종방을 아쉬워할 시청자들을 위해 내레이션을 다시 들어보면 이렇다. “조련사 여왕에 충성경쟁을 하는 친박 사자와 비박 호랑이가 패권 공천싸움을 시작했다. 동물의 왕국이 망할 날도 머지않았다.” 동물의 왕국이란 표현은 당초 대본엔 없던 것이었다. 야권의 전직 방송 기자가 저서 출간을 앞두고 소개한 동물의 왕국 부분이 히트를 치자 이를 냉큼 인용했다.

“TV 프로그램 중 ‘동물의 왕국’을 즐겨봅니다.” “왜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세요?”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의원의 저서 ‘누가 지도자인가’ 가운데 20여년 전인 1994년의 특별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이는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 지난달 25일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언급한 ‘배신의 정치’가 국정을 마비시키면서 과거 인터뷰 때의 동물의 왕국이 부각된 것이다.

사실 ‘동물의 왕국’은 많은 사람이 즐겨 본다. 근데 동물의 왕국에선 배신이 없는 걸까. 흔히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인 수사자가 쇠약해지면 젊은 수사자한테 쫓겨나는 것을 배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정글의 법칙이자 야생의 질서일 뿐이다. 현 우두머리와 도전자가 1대 1 결투를 해서 이기는 자가 무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으로 치면 선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례적인 일도 발생한다. 케이블TV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점박이 하이에나 무리. 사회적 동물로 알려진 하이에나는 우두머리가 암컷이다. 이 무리의 여왕은 ‘고르크’다. 고르크는 성질이 괴팍해 수시로 무리들을 못살게 군다. 사냥감을 잡아 혼자 배부르게 먹고 나서도 2인자 ‘니키타’가 먹이에 접근하면 쫓아낸다. 다른 무리도 괴롭힌다. 하이에나 무리에선 여왕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게 철칙이다. 그러나 여왕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쿠데타가 일어난다. 무리들이 고르크와 처절한 싸움을 벌여 결국 폐위시킨다. 새 여왕으로 니키타가 등극한다. 배신을 말하려면 이게 진짜 배신이다.

배신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으면 모든 상황을 ‘배신’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게 된다. 알지 못하는 사실이 무궁무진한데도 자신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이유다. 여기에는 포용, 통합, 공존의 정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소신은 배신일 뿐이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뽑은 원내사령탑을 대통령이 낙인찍어 내쫓게 한 초유의 사태는 한 편의 왕조시대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정당민주주의 가치와 삼권분립 원칙을 무참히 짓밟은 이 사건은 유신 독재의 데자뷰를 느끼게 한다. 유승민은 사퇴 회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절대 권력이 절대적 충성심을 요구하고 있는 시대로 회귀했으니 한국정치의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박 대통령이 40세가 되기 전에 쓴 1990년 9월 일기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권력은 칼이다.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 칼은 더욱 예리하다.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사람을 크게 해칠 수 있다. 그러므로 큰 권력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지만 정작 그 큰 권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당사자다.… 그 칼을 마구 휘둘러서 쌓이는 원망, 분노, 적개심 등은 되돌아와 그의 목을 조른다.”(‘고독의 리더십’)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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