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철 칼럼] 이승만 대통령 50주기라는데 기사의 사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파란만장한 90평생을 마감했다. 며칠 후면 50주기(週忌)다.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밀려나 조국을 떠나야 했던 이승만은 ‘생전 귀국’을 간절히 원했으나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긴 했지만 장례는 국장도 국민장도 아닌 가족장을 치러야 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의 서글픈 단면이다.

추모행사는 50주기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예년처럼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서울에선 현충원 추모식이 전부란다. 그 흔한 기념학술대회 하나 없다. 그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무관심, 진보·좌파 성향 국민들에 의한 배척이 여전하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우리 헌정사에서 이승만에게는 분명 공과(功過)가 혼재한다. 그럼에도 거의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해방 직후 각기 미국과 중국에서 귀국한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적 영웅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외교론, 김구는 무장투쟁론을 앞세워 70평생을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한 결과다. 하지만 지금 김구는 위대한 민족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데 반해 이승만은 독재자이자 한반도 분단의 주범인 것처럼 평가받는다. 좌파 역사학자들이 씌운 아픈 굴레다. 이승만은 정치적 독재자로 마감한 건 틀림없지만 건국과 6·25전쟁 국면에서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해방정국에서 미국 주도 냉전질서에 편승한 이승만의 단정수립론과 남북협상을 주장한 김구의 통일정부론이 격하게 대립한 결과 이승만이 이겼다. 통상 역사적 평가는 승자의 몫인데도 이 문제는 정반대다. 사실 통일정부론은 명분에선 앞서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반드시 옳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단정수립을 서두르지 않았을 경우 적화됐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없지 않다. 이승만의 장기독재가 악행(惡行)이라 해서 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공로까지 폄하해선 안 된다.

김구는 1948년 4월 자신의 평양회담 참석을 반대하는 아들 김신에게 이런 말을 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타협한 최명길의 현실주의가 없었다면 아마 이 나라는 망했을 것이다. 동시에 삼학사의 명분론과 죽음을 감수하는 기개가 없었다면 또한 망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최명길, 김구는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아니겠는가. 역사가 최명길과 삼학사의 기여를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정부수립에 관한한 이승만도 김구와 같은 반열의 평가를 받는 게 옳다.

이승만은 6·25 때 탁월한 전쟁수행 능력을 보였다. 미군을 재빨리 끌어들여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공포로 석방을 지렛대 삼아 벼랑끝 외교를 펼친 결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승만이 아니고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공산군을 격퇴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세계 최강국 미국과 혈맹을 맺음으로써 국가안보를 도모한 것은 크나큰 업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에서 벗어난 100여개국 중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그 원동력은 시장경제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일차적인 공은 이승만에게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기반으로 박정희가 나라를 산업화시켰고, 또 김대중·김영삼이 민주화를 이뤄냈다고 본다.

국민 개개인의 사관(史觀)은 당연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에 대한 맹목적 비판은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국가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50주기를 맞아 건국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본격화됐으면 좋겠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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