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50년] ‘시련→도전→극복’ 기적은 계속돼야 한다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연중기획 시리즈 ‘광복 70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 제2부를 27일 시작합니다. ‘애증의 한·일 관계’를 주제로 했던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광복 및 분단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정치·통일·경제·사회복지·문화 등 각 부문별로 점검하며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하게 됩니다.

36년 동안 일제 식민 통치를 겪으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대한민국.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지만 그 기쁨은 짧았다. 50년부터 3년간 이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전 국토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폐허가 된 한반도를 두고 희망을 얘기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가 없어 보이던 최빈국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현재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했다.

◇잿더미에서 일어난 대한민국=한국이 전쟁 직후인 55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에 가입할 당시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66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최빈국인 가나와 가봉에도 뒤지는 수준이었다.

가까스로 전쟁 이후 혼란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에 전념하기 시작한 시기는 60년대 들어서다. 62년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1차 계획으로 한국은 산업화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당시는 실업률이 25% 가까이 치솟던 때다. 국가 재건의 종잣돈 마련을 위한 차관을 얻는 대가로 광부와 간호사들이 63년부터 대거 독일로 건너갔다.

수출주도형 경제 발전을 전략으로 성장의 기틀을 잡은 정부는 70년대부터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기 시작했다. 금융 부문을 광범위하게 통제해 정책지원에 필요한 자금을 배분·조달했다. 건설사들은 중동을 중심으로 해외로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이며 ‘건설 붐’을 일으켰다.

한국은 제1차 경제개발 계획 마지막 해인 66년 11.9%로 처음 경제성장률 두 자릿수 시대를 열었다. 이어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제2차 계획(67∼71년) 10.0%, 제3차 계획(72∼76년) 10.2%를 각각 기록했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공여국으로=시장에 대한 개입이 부작용을 드러내자 정부는 80년대 들어 대외개방을 시작했다. 90년 이후에는 정보기술(IT) 기업, 벤처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조선·반도체·철강·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한 가운데 한국은 96년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9년엔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도 가입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공여국이 된 사례는 한국이 유일하다.

2010년에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 자격으로 서울에서 정상회의를 열었다.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 이견을 좁히는 중간자로서 한국은 주목받았다.

1인당 국민소득은 60년 전의 434배인 2만8180달러(2014년 기준)로 늘어났다. 명목 국민총소득은 53년 483억원에서 지난해 1497조원으로 3만배 넘게 불었다.

1차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할 때 1억 달러가 안 됐던 수출액은 지난해 5730억 달러로 커졌다. 수출과 수입을 합친 무역규모는 지난해 전 세계 8위다. 외환보유액은 60년 1억6000만 달러에서 지난달 기준 3715억 달러를 기록, 세계 6위 수준으로 증가했다.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56년 4억원 규모에서 77년 1조원을 돌파했고, 93년엔 100조원까지 늘어났다. 현재 시가총액은 1320조원 수준이다.

◇역경과 극복의 순간들=한국의 경제가 숨 가쁘게 달려오는 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비 때마다 시련도 찾아왔다.

광복 후 찾아온 첫 위기는 6·25전쟁이었다. 전쟁의 피해 규모는 68억4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53년 GNP 40억8000만 달러의 1.7배 규모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기간산업을 복구하고,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가까스로 세울 수 있었다.

70년대 초에는 세계 경기가 악화되면서 국내 기업들도 위기를 맞았다. 당시 기업들은 연이율 50% 이상의 사채에 의존해 경영하던 관행이 일반적이었다. 기업들은 사채업자들의 어음교환 요구로 언제 부도 위기에 몰릴지 모르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72년 8·3사채동결 조치로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를 무효화시키고,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정부 결단으로 기업 재무구조는 개선됐고, 주식·채권시장 육성의 발판이 마련됐다.

73년과 78년에는 1·2차 오일쇼크를 겪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은 상당한 경제적 충격을 받았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73년 3.2%에서 74년 24.3%로 뛰었다. 2차 오일쇼크 때에는 10·26사태까지 발생해 충격이 겹쳤다. 정부는 강력한 물가안정 대책과 중화학공업 육성, 중동 건설 진출 등으로 위기를 넘었다.

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노사 분규가 급증했다. 근로자 권리와 보상은 개선됐지만 노사 대립이 고착화됐고,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97년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난관에 봉착했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은행이 문을 닫았다. 회사에서 일하던 인력들이 대거 구조조정을 겪었고, 정부는 외채를 갚을 돈이 없어 IMF에 손을 벌렸다. 정부는 대기업 간 빅딜과 워크아웃 등으로 기업과 금융 부문의 과감한 구조개혁을 추진했고, 국민들은 자발적 금 모으기 운동과 저축·절약 등으로 고통 분담에 나섰다.

수백만명의 신용불량자(채무불이행자)를 양산한 2003년 카드사태도 큰 시련이었다.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회원 모집과 정부의 부실 감독이 빚은 사태였다.

2008년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도 한국 경제를 위협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재정건전성이 큰 방패 역할을 했다. 대기업과 은행의 양호한 재무 상황, 엄격한 주택담보대출 관리 등이 위기를 상쇄시켰다. 다른 경쟁 국가들에 비해 경기침체를 비교적 빨리 극복했다는 평가다.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국가다. 하지만 기존 산업 성장의 한계, 저출산·고령화, 재정 적자 심화, 경제성장률 저하, 심각한 사회 갈등 등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전문가들은 비관에 빠질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를 과감히 개편하고, 해외에서 성장동력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조언한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수장으로 경제 정책을 이끌었던 강봉균 전 장관은 26일 “한국 경제가 구조개혁에 성공하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 한·일 국교정상화 50년 [기사 모두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