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한 세대’, 욕망과 후회 기사의 사진
1948년 6월 9일 ‘대한민국’ 국호가 결정됐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의원 30명의 투표 결과 17표를 얻어 이같이 확정된 것이다.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등이었다. 그해 7월 17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다. 당시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날인했다. 이승만은 사흘 후 국회가 선출한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73세였다.

앞서 그는 5월 31일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후 “우리나라가 독립을 찾은 것은 하나님의 힘”이라고 말했다. 때문인지 국회 개원 기도를 월남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윤영 목사에게 맡겼다. 이승만은 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했다.

이승만 연구를 계속해온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승만 재임 12년간 135명의 장관급 가운데 개신교인이 47.7%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개신교인 가운데 근대 교육을 받은 엘리트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대한민국의 반공적 성격과도 맞았다고 말한다.

철저한 신앙인이었던 이승만은 재임기 군목과 형목 제도를 확립했다. CBS와 극동방송 설립도 허가했다. 국영 라디오 중앙방송에 개신교 프로그램을 넣던 시절이었다.

지난 16일 한 종합일간지가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2.4%로 박정희(33.6) 노무현(29.3) 김대중(12.8)에 이은 네 번째였다. 50·60대의 둘 중 하나가 박정희 이승만, 20·30대의 둘 중 하나가 김대중 노무현에게 쏠렸다. 세대가 둘로 갈린 정치 양극화인 셈이다.

사실 이승만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청년 개화파로서 투옥과 탈옥 등의 환난을 당했다. 그때마다 “하나님 내 나라와 내 영혼을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변화됐다. 옥살이 기간에 잡범과 정치범들에게 ‘성경 읽어주는 남자’이기도 했다. 1904년 그는 미국 선교사들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 삼아 외교독립론을 역설했고, 한편으로 한인기독학원과 교회를 세우는 등 복음 전파에 열정적이었다.

이승만은 한국교회사의 큰 산맥임에 분명하다. 역사신학자들의 탐구 대상이기도 하다. 세상적 관점과 또 다른 성서적 프레임이 요구되는 인물이다. 한데 그에 대한 연구가 체계를 갖추기도 전에 ‘스스로 지혜 있는 체’(롬 12:16)하는 이들로 인해 동티나는 상황을 접하곤 한다. 목사라는 타이틀로 ‘건국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영화를 추진하다 ‘자기의’만 드러나 크리스천 모두를 곤혹에 빠뜨린 인물이 대표적 사례다.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이승만을 극단적 매카시즘 신봉자로 비치게 하는 극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행위도 ‘크리스천 리더 이승만’ 평전을 쓰기 어렵게 하는 경우다.

기독교인에게 이승만은 ‘크리스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다. 이 크레디트는 곧 하나님의 의를 향한 신념과 하나님의 사상인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지키려 했던 한 리더의 삶 자체에 대한 평가다. 그는 다윗, 솔로몬이 그러했듯 위대한 지도자임과 동시에 사단의 꾐에 빠지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담대했으되 소심했고, 의를 따랐으되 신념이 넘치게 강했다. 그리하여 말년 부정선거 등으로 자기의를 드러내 하나님 심판을 받아야 했다.

20, 30대에게 이승만 박정희는 지나간 한 세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50대 이상에게는 ‘욕망이자 후회’가 뒤섞인 ‘자기의’의 아이콘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전 1:4)’. 지나간 세대는 그 고유의 성과를 축적해 그것을 하나님 인격 속에 남기고 떠나야 한다. ‘욕망과 후회’로 붙잡으면 안 된다. 두 인물의 평전을 읽되 자기의로 만들지 말 일이다.

전정희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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