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50년] 북파공작원 출신… 죄인같은 삶 광복군 아버지 생각하면 뭉클 기사의 사진
“광복 7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독일처럼 총성 없는 통일을 이루길 간절히 바랍니다.”

독립유공자 후손인 신병조(70·사진)씨는 26일 죽기 전에 평양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해방둥이’로 6·25전쟁을 겪은 그에게 남북 분단은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이지만 피란생활은 지금도 선명한 상처로 남아 있다.

신씨는 1945년 3월 충북 청주시 내수읍에서 태어났다. 얼마 안돼 광복을 맞았고 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의 폐허와 가난 속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기는 어려웠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손인 그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고향을 지켜야 했다.그의 안방에는 노태우 대통령 때 받은 아버지의 훈장이 가보처럼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국가유공자인 신인식 애국지사다.

신씨는 “아버지는 어렵고 힘든 시절을 이겨낼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회고했다.

신씨 아버지는 1943년 10월 일제에 강제 징집당해 일본군 부대에 있다가 1944년 5월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중국군 유격대,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복무했다. 광복 후에는 청주에서 형무소와 우체국 직원으로 일했다. 1987년 작고한 후 3년 뒤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전수받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이를 증명할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족들은 아버지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광복군 행적을 추적했고 아버지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어렵게 찾았다.

신씨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신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매년 광복절이면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27세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한 신씨는 북파공작원 부대원으로 복무했던 경력 탓에 젊은 시절을 어렵게 지냈다. 1967년 11월부터 강원도 설악산 일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건강이 악화돼 제2보병사단으로 전출됐다. 그는 비무장지대(DMZ)를 건너 북한에 가본 적은 없지만 28개월의 군생활을 마친 뒤 경찰관들이 10년 넘게 따라다녔다.

그는 “경찰들이 군 제대 후 모든 행방을 감시해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며 “주변사람들이 죄인처럼 쳐다보고 두려워해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광복 70년사에서 가난을 탈피하고 새 출발을 하는 계기가 됐던 새마을운동을 높게 평가했다. 그 역시 새마을지도자를 21년 동안 맡아 마을의 궂은일에 앞장섰다. 신씨는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며 “어렵고 힘든 시절을 극복하게 해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거론하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울분을 쏟아냈다.

그는 “제대로 사과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위안부 할머니가 매우 안타깝다”며 “일본은 더 늦기 전에 고개 숙여 사과하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일본은 독도나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씨는 한국 역사에 대한 교육을 당부했다. 그는 “이 땅의 자라나는 학생들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며 “한국 역사에 대한 교육이 약해지면 굴욕적인 역사의 교훈도 잊혀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주=글 홍성헌 기자

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adhong@kmib.co.kr

▶ 한·일 국교정상화 50년 [기사 모두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