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50년] 3·1운동 조부 사망 후 풍비박산, 친일파는 부귀영화… 말도 안돼 기사의 사진
“1919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할아버지는 일제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살길이 막막해진 아버지는 남의 집에서 꼴머슴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진영환(70·사진)씨는 26일 독립유공자와 후손이 겪은 모진 삶을 털어놨다. 진씨의 할아버지(진만조)는 1919년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검거돼 전주교도소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는 만세운동 당시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일본 경찰에 맞서 몽둥이를 휘두르다 주범으로 몰려 심한 고문을 당했다. 후유증으로 조기 출옥했으나 이듬해 3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당시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었다. 진씨의 아버지 진병기(1994년 작고)씨와 진씨의 고모다. 아버지 진씨는 당시 9살, 고모는 12살이었다. 할아버지가 일제에 항거하다 사망한 뒤 두 사람의 삶은 망신창이가 됐다. 아무도 이들을 돌보지 않았다. 화근이 될까봐 오히려 외면했다. 아버지는 머슴으로, 고모는 민며느리로 팔려가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하다 성인이 돼 평안북도 신의주 수풍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이후에는 일제가 추진한 철로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슬하에 4남3녀를 둔 아버지는 광복 후에는 전북으로 내려와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진씨는 “아버님과 고모는 할아버지가 항일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며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7남매 중 장남인 진씨는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기기술자가 되기 위해 다시 서울 수도공고 야간과정을 1년 수료했다. 이어 1965년 전기면허를 취득했고 한국전력 직원으로 15년 동안 일했다.

김대중정부 시절에 기술사 대우 자격을 취득한 덕분에 지금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온누리이엔지에서 이사로 일하며 전기 분야 감리를 맡고 있다. 대전 서구 관저동 택지개발지구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칠순의 나이지만 웬만한 젊은이만큼은 벌고 있다고 자랑했다. 진씨는 몸이 좋지 않아 군대에 가지 않았지만 아들 3명은 모두 군복무를 마쳤다고 했다. 장남은 KAIST를 졸업하고 IT 업체를 창업했고 둘째는 회사원, 막내는 한의사라고 귀띔했다. 그는 자신은 비교적 다복한 삶을 살았지만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정부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챙기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진씨의 할아버지도 1993년에야 정부로부터 자주독립운동 표창장을 받았고 2001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전북 임실군 선영에 안장됐던 유골은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이장됐다.

진씨는 “독립유공자 후손들 중 삶이 순탄치 않은 이들이 많지만 모두 자긍심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를 도왔던 친일파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조국 광복을 위해 앞장선 독립운동가 후손은 대부분 질곡의 삶을 살았다”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에게 정당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전=글·사진 정재학 기자

jhje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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