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소수의견 vs 다수의견 기사의 사진
다수의 횡포를 막고 소수의견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국회선진화법’이다. 그런데 이제는 ‘소수 독재법’이 되어 망국의 길을 가고 있으니 다시 법을 개정하자고 한다. 이 법이 다수의 횡포와 소수의 물리적 대응을 막는 데는 이바지했지만, 오히려 소수의 횡포로 인해 식물 국회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이 든다. 소수가 보호받아야만 정의로운 사회인가? 아니면 다수의 뜻을 따라 소수가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올바른 민주주의인가?

대부분 사람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가진 자의 횡포로 가난한 자가 억울함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싸울 때 우리가 서야 하는 자리는 ‘옳은 자’의 편이다. 성경에서 부자를 질책하는 이유는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가지지 않은 자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수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은 보호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소수와 다수, 이념과 진영의 논리를 뛰어넘어 ‘공의’가 실종되어가는 것이다. 이제는 자유를 억압받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자유로워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묘하게도 같은 시기에 두 편의 영화가 화제가 됐다. ‘연평해전’은 지난 주말 관객 점유율 27.3%를 보이며 누적 관객 496만명을 기록했지만, ‘소수의견’은 점유율 0.24%로 총 37만5000여명이 관람한 것으로 기록됐다(7월 15일 기준).

논쟁은 영화를 작품으로 보지 않고 이념으로 보면서 시작됐다. 2005년 창간되어 미국의 인터넷 언론으로 온라인 저널리즘의 대명사로 평가받고 있는 허핑턴포스트는 영화 ‘소수의견’의 원작자 손아람에게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연평해전’에 비해 ‘소수의견’이 관객을 모으지 못한 이유가 혹시 권력에 의한 억울함은 없는지를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과도한 자유로 인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자본의 자유가 결국 상영관 수를 결정하는 것이고, 자본의 자유가 극대화됐을 때 관람객들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 ‘자유’가 억압되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의구심에 대하여 이기적 ‘자유’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전횡은 소수와 다수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자유가 억압돼 받는 불이익보다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선’으로 생각하는 이들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가 더 크다. ‘소수’에 관한 인권과 자유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국회선진화법이나 동성애자들을 위한 ‘성 소수자 차별 금지’ 역시 소수 인권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한 일이다. 다수의 전횡에 대한 보호다. 그렇다고 소수의 인권이 다수의 인권에 대한 횡포를 용인한 것은 아니다. 소수는 보호받아야 하지만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을 억압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의 기준과 진리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이 사회를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문제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이기심과 횡포다. 질서와 기준이 없는 자유는 혼돈과 두려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절대자를 부정하고 진리의 기준을 두지 않으려는 시대가 불안하고 두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가 옳다고 하여 옳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의’가 필요한 때다. 우리가 받고 누리는 것이 ‘마땅한 권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포기한 권리로 말미암은 ‘은혜’라는 것을 알 때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가 주는 기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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