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배신의 정치? 정치의 배신! 기사의 사진
지난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을 배신자로 낙인찍은 후 이른바 ‘배신의 정치’가 화두가 되었습니다. 황제가 되길 꿈꿨지만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절규하면서 죽어간 시저와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에 시저를 암살했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연상되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배신과 음모가 있었지만 우리는 예수와 그의 제자 이스카리옷 유다의 관계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서구세계에서 ‘배신자’, ‘저주받은 자’의 집단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가 그의 스승 예수를 배신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가 유다는 테러리스트였다고 추정한 것을 근거로 배신의 이유를 정치적 기대의 좌절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 40년을 예수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계획에 바쳤던 영화감독 드라이어가 그런 사람입니다. 드라이어는 세금 납부에 저항한 혁명론자들과 예수에게서 정치적 메시아를 본 모든 애국적 유대인에게 예수가 등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들을 배반(背·등 배, 反·되돌릴 반)했기 때문에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고 봅니다. 자신의 동성애를 숨긴 적이 없는 영화감독 파솔리니는 유다가 배신한 이유를 예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한 데서 찾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긴 머리털로 발을 닦은 여인에 대한 질투라는 것이지요. 연정을 품은 동성애자인 유다의 격렬한 증오가 이유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돈에 대한 욕심이 그 이유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 여인을 두고 분개한 제자가 바로 유다였다는 요한복음의 보도에 근거한 것입니다(요한 12:4∼5). 또 대제사장이 은 서른 개를 내놓자 ‘그때부터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마태의 보도(마태 26:16)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러나 ‘은 서른 개’는 우스울 정도로 적은 액수입니다. 목사이자 소설가인 백도기는 유다의 ‘정의의 윤리’와 예수의 ‘사랑의 윤리’가 충돌한 데서 배신의 이유를 찾습니다.

여러 이유 가운데 가능성 있는 이유는 유다가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예수가 한 ‘하나님 나라운동’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추구한 가치가 달랐던 것이지요.

유다는 다윗 왕정의 복권을 추구했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평등과 자유와 정의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배신한 유다를 예수께서 표독스럽게 비난하지 않고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라고 연민의 정을 가지고 보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허락하신 것도 배신을 개인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추구한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배신은 개인적 관계에서 일어나지만 배반은 추구하는 가치의 차이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집단(공공)적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신의 정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치의 배신’, 곧 정치 자체에 대한 배신입니다.

‘배신의 정치’는 충성을 의심하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는데 그치지만 국민과의 관계에서 (공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지도자의 ‘정치의 배신’이 끼치는 영향은 한 나라를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파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대선 공약들 가운데 무엇이 실현되었고 무엇이 파기되었는지, 집권 기간에 국민에게 한 약속들 가운데 무엇이 지켜졌고 무엇이 폐기되었는지 성찰하는 지도자라면 자신에 대한 개인적 충성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을 더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채수일 한신대 총장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