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대숲이 키운 희귀동식물과 선비들 기사의 사진
전남 담양 태목리 대나무숲. 담양=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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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선비를 상징하고, 대나무 숲은 사시사철 청량하다. 성과 속, 강과 약, 나무와 풀 등 대나무처럼 중첩된 이미지를 한 몸에 많이 가진 식물을 달리 찾기 어렵다. 예로부터 사군자의 하나로 고귀하게 취급됐지만, 서민의 실생활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식용, 생활용품, 심지어 무기로까지 폭넓게 활용됐다. “굳세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속이 비어 있거나 차 있는 것이 조금 다르지만 마디가 있는 점은 동일하다.”<진(晋)나라 대개지(戴凱之)의 죽보(竹譜)>

대숲 속에서 더위를 잊기 위해 지난달 22일과 23일 담양습지와 담양의 원림들을 찾았다. 담양습지는 영산강 상류 담양군과 광주광역시가 만나는 하천 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대숲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환경부는 2004년 이곳의 습지 약 1㎢(98만㎡)를 하천습지로는 처음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영산강유역환경청 김순정 자연환경해설사는 “대숲 면적은 15만㎢가량으로 왕대, 죽순대, 솜대가 주종이다”라고 말했다. 대숲 속으로 설치된 나무 데크를 따라 걸으니 흔히 볼 수 없는 곤충과 거미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긴호랑거미, 검은물잠자리, 나비잠자리, 아시아실잠자리, 알락하늘소 등이 보인다. 김 해설사는 “데크를 벗어나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면 흰줄숲모기 등 모기의 공격이 매섭기 때문에 완전무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비 온 후 대숲에서 자라는 흰망태버섯이 보였다. 캡슐 모양의 외계인이 흰 망사치마를 입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기름진 땅 바닥에는 지네류가 많고 황줄까막노래기 등 노래기 종류도 풍부하다. 대숲의 풍부한 먹이가 온갖 새와 포유동물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담양습지에는 지금 매 삵 수달 맹꽁이 황구렁이 다묵장어 흰목물떼새 등 숱한 멸종위기종과 쇠백로, 중대백로, 해오라기, 황로 등이 어울려 산다. 겨울에는 큰고니, 기러기, 쇠물닭, 흰꼬리수리 등이 찾아온다. 대숲을 지나 상류 방향으로 제방 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이미보가 보이고, 여기까지가 습지보호지역이다. 보 바로 밑에서는 원앙 가족이 새끼들에게 야생적응 훈련을 시키고 있다. 제방 흙벽 사이에서 물총새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흔치 않은 파랑새도 보았다.

발길을 가사문학로 쪽으로 돌려 소쇄원, 식영정, 송강정, 명옥헌 등 정자와 원림으로 향한다.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 숲은 사계절 언제고 좋지만, 여름에는 천연 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대봉대(待鳳臺) 앞에 이르니 밑의 네모 난 작은 연못과 원추리꽃에 눈길이 간다. 동행한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조정숙씨는 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 48영 중 제6영 ‘소당어영(小塘魚泳)’을 소개했다. ‘네모진 연못 한 이랑도 못되나,/ 맑은 물받이 하기엔 넉넉하구나./ 주인의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 낚싯줄 내던질 마음 전혀 없어라.’

소쇄원의 건축학적 하이라이트는 계곡의 물길을 그대로 두기 위해 구멍을 내고 쌓은 돌담인 오곡문(五曲門)과 길이 50m에 이르는 흙돌담이다. 약 500년 전 소쇄원 건축을 기획한 양산보(梁山甫)는 돌담 집으로 유명한 제주도에서 뛰어난 석공들을 데려다 석축과 담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흙돌담은 소쇄원을 외부와 갈라놓는 경계 구실을 하지만, 대문 없이 ㄱ자 모양으로 돼 있어 닫힌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모양새다. 관광객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흙돌담에는 김인후가 소쇄원 48영 연작시를 써 붙여 놓았던 흔적이 있다.

제월당(霽月堂)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앉으니 시원한 바람과 장쾌한 풍광에 일어서기가 싫어진다. 광풍각(光風閣)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500년 이상씩 묵은 것으로 보이는 산수유와 배롱나무 고목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고목의 한 가지 위에는 새가 똥을 누고 간 결과인지 작은 벚나무가 기생하고 있다. 조 해설사는 “봄에 기생수에 꽃이 피면 영락없이 어사화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소쇄원에는 사계절 돌아가면서 꽃을 피우는 복사나무와 배나무(봄), 연꽃과 벽오동, 배롱나무(여름), 국화(가을), 매화와 동백(겨울)이 고루 배치돼 있다.

담양의 원림들이 어느 계절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좀 곤란해지지만, 나는 늦가을의 단풍이 가장 좋았다. 특히 소쇄원 광풍각 근처의 애기단풍과 식영정 마당 전체를 노랗게 뒤덮는 은행잎 카펫을 잊을 수 없다. 6∼7월 중에는 큰비 내린 뒤 2∼3일 지나서 흙탕물이 가셨을 때 소쇄원계곡이 좋다고 한다. 약 500년 전 계곡물이 늘 풍부했을 때가 재현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8월 초에는? 40여 그루 배롱나무 고목의 붉은 꽃들이 불붙는 장관을 이루는 명옥헌 원림으로 가라.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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