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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 칼럼] 아베담화에 기대 접었지만 그래도

“강제징용을 평화나 국제공헌으로 읽자는 것은 조지 오웰의 ‘1984’식 언어일 뿐”

[조용래 칼럼] 아베담화에 기대 접었지만 그래도 기사의 사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1949)는 전체주의의 비극적 종말을 그렸다. 당시로선 근미래소설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지칭은 좀 어색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빅브라더의 존재 때문이다.

빅브라더는 소설 속에서도 가공의 인물인데 무소부재의 권력자로 각인되면서 이후 현실 세계에서 모든 독재자의 상징으로 통한다. 곳곳에서 일상을 감시하는 빅브라더. 하지만 오웰이 빅브라더보다 더 중시한 것은 언어의 말살과 개조였다. 감시도 중요하나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 독재국가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에 반하는 말이나 표현을 구언어(Oldspeak)라며 금지한다. 오로지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표현이나 사물명, 기능적으로 지칭하는 말들, 이른바 신언어(Newspeak)만 허용된다.

예컨대 자유(free)를 ‘정치적’ ‘지적’ 등의 말과 같이 사용하는 것은 범죄라고 가르친다. 말뜻이 바뀌고 용어가 제거되는 오세아니아. 오웰은 “신언어는 매년 어휘가 줄어드는 세계 유일의 말”이라고 썼다. 현상을 표현하고 비판할 도구가 사라진 뒤 오세아니아에서 생각은 철저하게 위축됐다.

언어는 생각을 지배한다. 의지도 언어가 없으면 표명할 수 없고 세계를 바꾸자는 결의도 해당의 표현과 단어가 빛을 잃으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올여름 일본에서 선포될 언어, ‘아베담화’에 주목하고 우려하고 있는 만큼 ‘1984’의 신언어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아베 총리는 그동안 전후 청산, 제나라를 지킬 수 있는 평범한 나라 추구를 앞세워 평화헌법 개정, 침략, 군사대국화 등을 자신만의 신언어로 포장해 이를 ‘평화’ ‘국제사회에 기여’라고 우기고 있다. 그가 말하는 ‘평화’는 아무래도 일본 시민사회나 세계가 공유하는 평화와는 다른 듯 보인다.

얼마 전 한 일본 민영TV의 서울특파원이 내게 물었다. 대체 한국 시민사회가 원하는 아베담화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요구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요체는 간단명료하다. 기왕에 일본정부가 고백했던 ‘고노담화’(1993) ‘무라야마담화’(1995)를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당장은 어려울지라도 위안부 문제 해법의 실마리를 거론하는 것이면 족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더불어 일본정부가 한·일 관계에서 말끝마다 강조하는 ‘65년 한일기본조약 완결론’, 즉 개인 배상 등은 50년 전 협상으로 말끔히 해결됐으니 더 이상 논할 것 없다는 입장도 재고했으면 한다. 적어도 65년 당시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위안부, 사할린 징용자, 원폭 피해자 등 세 사안에 대해서는 전향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작금 아베 총리의 행태는 최소한의 기대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퍅해 보인다. 평화헌법 해석개헌을 통한 안보법제 강행을 일본 시민사회가 극력 반발하고 있음에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다. 사실 일본정부는 지난 전쟁에서 310만명의 자국민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제대로 된 대국민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런 정부가 이웃나라의 요청에 귀 기울인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베 담화에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희망마저 놓아버릴 수는 없다. ‘강제징용’을 ‘평화’나 ‘국제공헌’으로 읽자고 목소리를 높일 수는 있어도 ‘1984’ 식의 신언어로는 그 사회를 결코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아베 총리를 비롯해 일본 시민사회가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비극적 종말을 거듭 곱씹어봤으면 한다. 강제를 강제라고, 평화를 평화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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