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대법관 획일화로는 상고법원 어림없다 기사의 사진
국민적 이목이 쏠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지난달 2건 나왔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법·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16일)과 형사사건의 성공보수 약정 무효 판결(23일)이다. 그런데 이들 판결에는 대법원의 정치적 의도가 숨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다시피 원 전 원장 사건은 유무죄 판단을 아예 하지 않은 채 원심의 사실관계 확정에 오류가 있다며 파기 환송했다. 충분히 사실관계를 따질 수도 있었는데 대법원은 상고심이 법률심이라서 사실심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간 법률심과 사실심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아온 만큼 납득하기 어렵다.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되 야당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정치적 판결을 내린 것으로 해석하는 이유다.

이 배경에는 대법원의 최대 역점사업인 상고법원 설립 문제가 깔려 있다. 상고법원 설치안의 골자는 상고사건 전담 법원을 만들되 상고사건 중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만 대법원이 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거세다. 최고법원이 아닌 상고법원이 최종심을 맡는 데 대한 위헌 논란이 핵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에 계류 중인 상고법원 관련 법안이 통과되려면 여야 협조가 필요하기에 교묘한 줄타기를 한 것이다.

상고법원이 신설되면 대법원은 정책법원 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정책법원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준 게 바로 성공보수 약정 무효 판결이다. 왜냐하면 쟁점이 성공보수의 과다 여부였지 약정 자체의 유·무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상고 이유에도 없는 성공보수 문제를 직권 판단해 기존 판례를 변경하는 혁명적 결단을 했다. 마치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보는 듯한 착각까지 일으키게 만들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판결이 13대 0이라는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나왔다는 점이다. 정책법원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이게 상고법원 추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정책법원이야말로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담아내야 하는 곳인데 소수의견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정말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는 국민적 요구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역주행하고 있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민일영 대법관 후임으로 고위 법관 3명을 추천한 것은 설상가상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개 보수와 진보 성향 각 4명, 중도 성향 1명의 대법관들이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아우르고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재판관 15명이 판사 출신 6명, 변호사 출신 4명, 검사 출신 2명, 기타 직역 3명으로 구성돼 있다. 반면 우리는 대법관 14명(재판에 관여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포함)이 거의 보수 성향인 데다 이 중 13명은 판사 출신이다.

대법관 구성이 편향돼 있으면 정책법원 기능을 달성하기 어렵다. 대법관 구성부터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상고법원 대신 대법관을 증원하라는 각계의 요구를 배척하는 것도 헌법재판소와 같은 권위를 누리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대법원은 대법관이 수십 명이면 깊이 있는 토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대법관 4명씩으로 구성된 각 소부(小部)의 대표들로 합의체를 구성하는 방법도 있다.

법관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한 상고법원 신설은 가당찮다. 그보다는 대법관후보추천위의 구성 방식부터 개선하는 게 순리다. 전체 추천위원 10명 중 대법원장이 민간위원 3명과 법관 1명을 임명하고, 선임대법관·법원행정처장이 당연직으로 들어가는 구조에서는 대법원장 의중을 쫓을 수밖에 없다. 시대 변화를 따르고 약자와 소수자도 대변할 수 있는 대법관 구성을 위해 사회적 논의에 착수할 때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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