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태철] 가면 속에 숨겨진 부끄러운 민낯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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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복면가왕’이란 프로그램이 인기다. 가수들이 1대1로 실력을 겨뤄 승자가 새로운 도전자와 경연을 이어가는 방식인데, 모두 가면을 쓰고 노래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외모나 춤 솜씨, 좋아하는 가수에게 각인된 선입관을 배제하고 순수한 가창력만으로 승부한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저 가수 대체 누구지?’라는 궁금증과 함께 경연 패배자의 ‘맨얼굴보기’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탈락자가 가면을 벗는 순간 자신이 예상한 가수이기를 기대하는 관중의 함성 혹은 탄식은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대중들이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가면’이란 독특한 소재 때문일 것이다.

가면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과 맥을 같이 해왔다. 주로 주술의 형식으로 발전해 왔는데 수렵 원시인들이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설부터 싸움할 때 상대방 위협용이었다는 설 등 기원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 역사가 어떠하든 간에 가면이 인간과 같이 발전해온 주된 이유는 ‘또 다른 나’ 혹은 ‘잠재된 나’를 일깨워주는 모티브였기 때문이리라.

가면을 쓰는 순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본연의 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나’로 탈바꿈한다. 가면의 형상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면 그 괴물로, 왕이면 가면 속의 나 또한 왕이 되는 것이다. 이때 가면은 고맙게도 용기를 동반한다.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가면만 쓰면 대중 앞에서도 큰소리치거나 춤을 출 수 있는 이유다.

이 때문이었을까. 가면은 예로부터 민초들의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봉산탈춤 등 우리의 전통 가면극은 흐느적거리는 춤사위와 운문의 노랫말을 섞어 양반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과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외국에서도 그런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일본 대표적 가면극의 하나인 교겐(狂言)은 서민들의 세태풍자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중세 이탈리아 ‘라 코메디아 델라르테’라는 거리 가면극 역시 부패한 왕이나 부자들을 향한 촌철살인으로 인기를 누렸다고 하니 동양이나 서양이나 가면은 서민들과 더 가까웠다고 할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가면은 ‘정의’의 이미지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잘 알려진 ‘각시탈’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은 비록 과장된 설정이지만 ‘가면=힘=신비함=정의’라는 공식으로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이들뿐 아니라 우리 기억 속의 가면 주인공들은 대부분 정의롭고 착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가면의 모습들이 사정없이 깨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회 곳곳에 도사린 ‘보이지 않는 비겁한 가면들’ 때문이다. 특히 온라인상 ‘익명’이라는 가면은 손 하나 대지 않고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치명적 무기가 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어느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하게 되면서부터 나타난 가면이다. 컴퓨터를 켜거나 스마트폰을 잡는 순간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자연스럽게 가면이 덧씌워진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이 드러났다면 절대 하지 못할 표현도 거침없다. 이로 인해 상대가 극단적 선택을 한다고 해도 멈추지 않는다.

‘유명인들 신상 털기’는 기본이 됐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마저도 모욕을 날리는 행위는 섬뜩한 느낌을 갖게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가면들이 점점 더 지능적이고 조직화되고 있다는 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사이트나 개인의 ‘진짜 얼굴들’에 정치인이나 교수, 대학생, 일반 회사원 등 화이트칼라들이 더 많다는 것도 심각성을 더한다.

‘보이지 않는 가면’은 도로에서도 나타난다. 운전자를 노리는 이 가면은 음주운전, 과속, 끼어들기, 보복운전 등 위험한 선택을 강요한다. 위험을 알면서도 ‘의도적 모험’을 즐긴다는 게 문제다. 여기엔 ‘나 하나는 괜찮겠지’ ‘안 걸리면 돈 버는 것 아닌가’와 같은 악마의 속삭임이 있다. 말장난이 아니다. 도로에서의 이런저런 부주의 사고를 비용으로 환산했을 때 연간 240조원이 넘는다는 통계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가면에 노출돼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개인 노력에 따라서는 이런 가면을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쓴다 해도 악용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노력들이 계속되는 한 지금처럼 사회는 그나마 건전하게 유지될 테니까.

신태철 종합편집부 차장 tc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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