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손열] 아베 담화를 넘어서 기사의 사진
우여곡절 끝에 ‘아베 담화’가 나왔다. 우리의 눈높이에는 태부족이지만 교묘한 표현 속에 반성, 사죄, 식민지 지배, 침략이란 단어는 다 나왔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서 나온 이른바 4대 키워드이고 한국 및 중국 정부, 일본의 양심 인사들이 줄곧 요구해 온 사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이를 받아 “일관되고 성의 있는 행동으로 뒷받침해 달라”는 실용적 자세를 취했다.

애당초 아베 담화 작업을 위해 총리 주도로 만든 21세기 구상 간담회의 최종 결과보고서에는 식민지 지배 반성·사죄 부분이 미흡하게 기술되었고, 지난 7일 아베 총리가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 간부들에게 보여준 담화 초안에는 식민지 지배, 침략, 사죄의 표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번 담화는 막판에 4개 키워드를 교묘하게 짜맞추어 언급한 것이다. 아베 담화 초안에 반발한 공명당과의 관계, 안보법안 국회 통과를 목전에 두고 야당에 공격 재료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 9월 초로 예상되는 중국 방문을 앞두고 상대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지 등 전략적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과거 식민지배는 서양제국 모두가 한 일이어서 일본만이 사죄할 바 아니고 전쟁은 침략이 아니라 아시아 해방에 있다고 믿는 아베 총리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임은 만천하가 알고 있어서 이번 담화가 무라야마 담화보다 내용상 후퇴했다고 새삼스레 분노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이번 담화가 한국뿐 아니라 중국,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전 세계 청중에 대한 발신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애당초 큰 기대는 삼가야 했다. 그럼에도 한·일 양측이 담화의 막전막후에서 상호 자제를 통해 감정적 대립을 회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심스럽게 협력의 모멘텀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향후 과제는 ‘투 트랙’ 실용노선 즉, 과거사는 따지되 이익 협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법론에 내용을 담는 일이다. 양국이 안보적 자극을 억제하고 다방면에서 이익의 협력을 확대하는 의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한·일 관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다. 광복 70주년을 기회로 한·일 관계의 가치와 목표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과 협력 수준을 제시하는 전략 비전을 마련함으로써 서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한·일 관계가 양국 간의 다양한 이익 교환을 목표로 했다면 미래의 한·일 관계는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태평양의 평화와 번영, 공생을 위한 협력이라는 가치와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일 양국이 과거사나 양자관계 사안으로 이전투구하기에 동아시아 형세가 워낙 엄중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세력 균형의 변화로 인해 본격적인 안보 딜레마를 겪을 위험성을 안고 있고, 경제면에서 동아시아는 저성장 기조에 돌입한 가운데 최근 환율전쟁 같은 불안정성에 노출돼 있어 역내 협력이 절실한 처지다. 한국은 미래의 동아시아 질서가 힘의 각축과 세력 균형이 지배하는 근대적 권력정치의 공간으로 남는 한 국익을 지키기 어렵다.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한·미·일 협력 네트워크를 심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 네트워크를 확대해 나가면서 두 네트워크가 갈등하지 않고 상호 공존하고 협력적으로 연계될 수 있도록 일본과 공조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경제적으로도 동아시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층적 협력을 이어가야 하며, 역사 문제도 양국 간 이슈를 넘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이란 프레임 속에서 다뤄갈 필요가 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험난한 동아시아 파고를 넘기 위해 새로운 발상으로 만나야 할 시점이다.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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