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2부)] 종교자유 보장 내세웠지만… 공산화 위해 교회 탄압

(제2부) 분단과 전쟁, 한국교회의 수난-<1> 북한정권 해방 직후 교회 핍박, 순교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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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신학교인 평양 성화신학교 1회 신학생들이 1949년 7월 졸업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성화신학교는 공산정권에 의해 평양신학교와 강제 합병되면서 1950년 폐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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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남과 북, 좌와 우의 대립은 교회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종교의 자유를 누린 남한교회와 달리 공산정권 치하의 북한교회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북한의 목사와 장로 등 크리스천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한교회도 고난과 시련을 피할 수 없었다. 분단과 전쟁 속 신앙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역경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해방 직후 북한을 신탁통치한 소련군과 이를 등에 업은 김일성 정권은 교회에 대한 회유와 탄압에 나섰다. 북한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1938년 통계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60여만 개신교 성도 중 약 75%가 평안도 등 서북지방에 분포돼 있었다.

소련군정과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은 형식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1945년 12월 이북5도 연합노회가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북한교회를 대표할 사절단을 파송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는 등의 결정을 내릴 정도로 북한교회는 미국과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김일성이 곱게 볼 리 없었다.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김일성의 발언대로 다수의 장로와 목사들은 토지개혁과 화폐개혁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공산정권의 종교탄압은 천주교의 ‘평양교구사’에 잘 나온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치노선에 상반된 유신론 배격에 급급하여 종교를 아편으로 불렀고 (중략) 국민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소년단, 민청 따위의 무서운 세포조직을 통하여 학우들의 반동 여부와 신자 학생들의 교회활동을 탐지 보고토록 하며 일요일은 영화감상회, 야영대회, 운동회 등을 구실로 주일미사 참여를 방해하였다. (중략) 그들은 교회학교를 몰수 또는 폐쇄하기 시작하였다.”

탄압은 46년 3월부터 본격화됐다. 평양지역 교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3·1절 기념행사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하려 했다. 하지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 행사를 금지하고 평양역에서 열리는 인민위원회 주최 기념집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반대한 교역자 다수가 체포됐다.

교회는 결국 단독으로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공산정권은 황은균 평양 창동교회 목사를 기도회 중간에 끌어내렸다. 분개한 3000여명의 성도들은 태극기와 십자가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해 11월 3일(주일) 치러진 선거는 공산정권과 북한교회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북한교회는 즉각 결의문을 채택하고 주일 선거를 거부했다. 북한교회는 김일성에게 보낸 결의문에서 “북조선의 2000 교회와 30만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신앙의 수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해 다음 5개조의 교회 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결정하고 실시 중인데, 여기에 귀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결의문에는 ‘성일(聖日) 엄수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일요일에는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도 참가하지 않는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주일 선거 참여거부에 심기가 불편해진 공산정권은 11월 25∼30일을 ‘미신타파 돌격기간’으로 정하고 보복 차원에서 반종교 투쟁을 벌였다.

김일성과 소련군정이 펼친 종교정책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북한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으로 등장한 종교인들을 포섭해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둘째, 계급정책을 실시한다는 명목 아래 개혁을 단행해 종교의 사회적 기반을 박탈했다. 셋째, 유물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계급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반종교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점차 종교활동을 위축시켰다.

결과적으로 북한교회는 3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은 한경직 목사처럼 남쪽으로 피신하거나 북한에 머물면서 교회를 지키다가 이유택 송정근 목사, 조만식 장로처럼 순교당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강량욱(1904∼1983) 목사처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김일성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친척인 강 목사는 북한에 존재하던 2000여 교회를 공산정권에 편입시키는 데 앞장섰다. 43년 제38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의 전신인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설립을 주도하고 4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37년 간 조그련 위원장을 맡았다.

강 목사를 주축으로 46년 태동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겉으론 ‘기독교 발전을 위해 매진한다’고 했지만 실제론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주일 선거 전에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우리들은 이남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거에 솔선 참여한다’는 4가지 원칙을 발표할 정도였다. 이 성명을 북한지역 전 교회에 강요하자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재건파’들은 선거는 물론 연맹 가입과 공민증 발급도 거부하며 강력 반발했다.

그러나 강 목사는 북한교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49년 3월 김익두 목사를 앞세워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의 모든 교회가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기로 결의했다. 38년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그 장소에서 또다시 부끄러운 결정을 한 것이다. 총회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교직자를 제명키로 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라고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북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을 끝까지 거부하고 공산정권에 맞섰던 성도들은 순교당했다. 조만식 오윤선 유계준 양재연 장로, 주영진 백인숙 전도사 등이 탄압에 쓰러졌다. 김익두 목사도 결국 공산정권에 이용만 당한 채 50년 10월 살해됐다.

6·25전쟁을 앞두고 공산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교회재산 몰수를 통한 압박, 성직자 포섭과 감시체제 확립, 신자들에 대한 세뇌공작, 성직자 및 지도자들에 대한 심문과 납치, 학살, 살해 등 탄압이 시작됐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사가 발행한 50년판 ‘조선중앙년감’에는 “북반부에 기독교 교회 수는 약 2000을 헤아리며 교도는 신교만 약 20만명에 달한다. 신교에서 현재 장로 수는 2142명이며 목사 수는 410명, 전도사 수는 498명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후 발행된 조선중앙년감에는 종교 항목 자체가 없어졌다.

강 목사는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서기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강 목사는 72년 남북적십자회담 기자회견 때 남한 기자들이 “북한의 기독교 형편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미 제국주의자들이 도발한 침략전쟁 3년 동안에 폭격으로 교회가 다 없어졌다. 미국 선교사들이 종교를 선전했는데 교회를 파괴한 것도 미국 선교사였다”고 말한 바 있다. 강 목사의 둘째 아들이 강영섭(1931∼2012) 전 조그련 위원장이고 현 조그련 위원장인 강명철(55) 목사가 그의 손자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북한교회는 한마디로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다”면서 “신사참배 반대의 중심에 섰던 평양 산정현교회가 공산정권 반대의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결국 모든 교회가 북한정권의 참혹한 탄압 속에 무너져 내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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