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2부)] 해방 후 北 개신교인 10만여명 월남… 남한 교회 급속 증가

제2부 분단과 전쟁, 한국교회의 수난 - (2) 北 크리스천들, 신앙의 자유 찾아 南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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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첫 국회 개회에 앞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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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갑작스럽게 해방을 맞이한 한국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인구변동 추이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일제에 강제 합병될 당시 한반도 인구는 1300만명 정도였다. 그러나 해방 무렵에는 2500만명에 달했다. 게다가 남한은 해방 이후 극심한 인구변동을 겪었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해방 후 3년간 공식 귀환자만 일본에서 100만명, 중국에서 6만명, 만주에서 1만명 등을 포함해 120만명에 달했고 이들 절대 다수가 남한을 선택했다”면서 “100만명 이상의 북한 주민이 월남했다”고 말했다.

◇신앙의 자유 찾아 남쪽으로= 월남한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는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에서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 가량인 약 20만명이 북한 지역에 살았는데, 이들의 35∼50%에 해당하는 7만∼10만명이 45∼53년 사이 남한으로 이동했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축을 이뤘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경향을 보였다. 북한 공산정권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미국의 앞잡이로 인식했다. 북한 기독교인들은 공산정권과 대립각을 세웠고 기독교인이 특히 많았던 평안도·황해도 등에서는 거센 반공운동이 일어났다. 공산정권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기독교인들의 월남 행렬은 6·25전쟁 발발 후인 1951년 1·4후퇴 때 절정에 달한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에 힘입어 남한에선 교회가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고 교수는 “47년 봄에는 수백명의 교역자들이 월남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따라서 남한 기독교 인구의 증가와 교회의 신설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45년 12월 설립된 베다니전도교회다. 베다니전도교회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기독교인으로 시작됐다. 46년엔 소속노회의 방침에 따라 이름을 영락교회로 바꾼다. 영락교회는 피난민의 만남의 장소이자 해방 후 혼란기에 기도의 처소로서 역할을 했다. 47년에는 성도가 100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면서 한국 최초로 주일예배를 2부로 나눠 드리기 시작했다. 영락교회는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로 발전했다. 6·25전쟁 발발 후 영락교회 교인들은 피난지에서 교회를 설립했으며 이는 부산영락교회와 대구영락교회, 제주영락교회로 발전했다. 임희국 장신대 교수는 “한경직 목사는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이며 교회가 서있는 곳에서 개인 구원과 사회 개혁이 일어난다고 보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다. 한 목사는 교육에도 관심을 쏟았다. 대광학교, 보성여자중고등학교, 영락중고등학교 등 미션스쿨을 설립하고 숭실대를 재건한다. 임 교수는 “한 목사는 기독교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정신적 기반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영락교회 외에도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는 귀국 동포들과 월남 기독교인을 수용하는 교회가 급증했다. 해방 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기독교에 입문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기독교 신자는 55년에 60만명, 50년대 말에는 100만 명으로 늘었다. 해방 후 15년 동안 기독교 신자 수는 연평균 25% 이상 성장했다.

◇기독교인들이 해방 후 주도권 발휘=기독교인들은 해방 후부터 50년대까지 한국사회 모든 영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미국유학 출신의 엘리트집단이거나 과거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에선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논쟁이 격렬했는데, 기독교인들은 반탁의 입장을 취했다. 조선기독교교단은 45년 11월 27일∼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선 조선독립촉성을 위해 3일간 금식 기도를 했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교인의 여론을 환기하고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하는 일 등을 결의했다.

조선기독교남부대회를 계기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띤 기독교신민회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가 탄생했다. 두 단체는 모두 반탁의 입장을 표방했다. 특히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는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촉성하고 단결을 견고히 하여 민족 통일을 기한다’는 강령을 만들었다. 그해 12월에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 조선독립의 완성을 촉진하자는 취지로 천주교·유교·천도교·대종교 등 다른 종교단체와 함께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대회를 개최했다.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서울 덕수궁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었지만 난항 끝에 결렬됐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좌·우익 사이의 찬·반탁 논쟁이 더욱 극심해진 가운데 1946년 6월 이승만은 지방 순시 중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발언을 한다. 교회 여론은 이미 단독정부 수립의 노선을 밝힌 이승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47년 2월 2일 영락교회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참여한 독립기원기독신도대회는 교회의 반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에는 “모스크바 삼상 결정 중 신탁통치 조항은 완전독립의 연기를 의미하므로 절대 배격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그해 11월 유엔은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이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에 왔으나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는 갈 수 없었고, 유엔은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토록 했다.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남한 내의 정치쟁점도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이 아닌 단독정부수립에 대한 찬반으로 바뀌었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단정 수립에 찬성했으나 일부 임시정부 세력은 중도파와 결합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에 나섰다. 김구와 김규식은 48년 4월 단독 선거를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단정과 남북협상 노선의 갈등 국면에서 교회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을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보수적 기독교의 지지기반 위에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장 이승만은 이윤영 의원을 지명해 기도를 드리게 했고, 이윤영은 하나님께 앞날의 독립과 행복을 비는 기도를 했다. 제헌국회 개원식을 기도로 시작했다는 것은 당시 정부수립에 기독교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 21개 부서장 가운데 9명이 개신교 신자였고 그 중 2명은 목사였다.

고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해방 정국에서부터 확대됐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국내 엘리트집단의 다수를 점하고, 사회 지도층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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