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원수사랑? 원수사랑! 기사의 사진
원수는 미워해야 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적 정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일어난 불의는 원상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마음에 남겨진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겠지만 흔적은 남아 있고, 우리는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한 불의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를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도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는 굴종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불의는 보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와 질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제와 구조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불의를 당하면 자존심은 상처를 받고, 상처받은 자존심은 복수를 통해 치유받고, 또 굴욕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복수를 하지 못할 경우 피해자는 병들게 됩니다.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용기 없는 자신을 증오하거나,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체제를 원망하면서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한 불의에 대한 복수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원수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민족을 식민지배하던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체제로서의 원수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도대체 원수관계에 있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인간적 가능성이 아닙니다. 원수는 미워해야 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하는 것이 인간적입니다. 만일 이것이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예수님은 인간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원수사랑만이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유일한 길이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목적론적인 판단 때문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적이고 목적론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에 의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사랑의 결과에 대한 기대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결과에 관계없는, 원수의 태도와 관계없는 원수사랑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과 대결이 일어날 때마다,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제기될 때마다, 남북관계가 이런 저런 이유로 얼어붙을 때마다, 교회 안에서도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수사랑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언제까지, 얼마나, 어떻게 그리고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 무조건적인 원수사랑이 오히려 역이용당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 간의 관계에서 원수사랑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순진하거나 유치한 생각이 아닌가, 예수님의 원수사랑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혹 가능할지 몰라도 집단관계에서는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한 명령이 아닐까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 현실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의 현실을 믿는 이들에게 원수사랑은 개인과 집단의 울타리에 갇힐 수 없습니다.

채수일 한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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