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2부)] 순교자 74%가 한국전쟁 발발 그해 공산군에 의해 희생

제2부 분단과 전쟁, 한국교회의 수난 - <3> 강성진 장로 등 순교자와 순교 현장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2부)] 순교자 74%가 한국전쟁 발발 그해 공산군에 의해 희생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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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공산정권의 기독교 탄압은 극에 달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어려운 이들을 돌보다 순교했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가 파악한 순교자 245명 중 181명(73.9%)이 그해 사망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나 순교비가 여럿 세워졌지만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순교자들도 적잖다.

◇죽음 앞에서도 환자 보살핀 부자(父子)=강성진(1890∼1950) 만경교회 장로는 광복 이후 전북 김제 만경면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이 한약방은 이 동네 유일한 의료시설이었다. 6·25전쟁 당시 공산군이 마을을 점령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았다. 자신이 떠나면 더 이상 환자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 장로는 하나님은 환자를 보살피는 것을 원하실 것이라며 피난을 포기했다. 공산군에게 끌려간 뒤에도 낮에는 환자를 돌보고 밤에는 구금되는 생활을 이어갔다. 강 장로는 끝까지 지역주민들을 보살피며 남아 있는 만경교회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위로했다. 공산군은 50년 9월 25일 강 장로를 끌고 가 양팔을 철사로 묶고 몽둥이로 온몸을 때린 뒤 우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순교자의 길을 걸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강 장로가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위로였다.

그의 장남 강춘길(1910∼1950) 집사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다가 순교했다. 강 집사는 전북 전주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신흥학교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가 됐다. 만경면에 병원을 열고 아버지와 함께 의료봉사를 하며 지역 복음화에 힘쓰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강 집사 역시 피난 대신 지역주민들 곁에 남는 것을 택했다. 그는 공산군에게 끌려가는 아버지에게 흔치 않은 노란색 양말을 신겼다. 아버지가 순교하면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강 집사도 얼마 후 교회 청년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펼치다 공산군에게 발각돼 숨졌다.

당시 만경교회에선 강 장로 부자를 포함해 15명의 성도가 순교했다. 김종한(1904∼1950) 담임목사도 50년 9월 25일 새벽기도를 인도한 뒤 예배당에서 혼자 엎드려 기도하다 공산군에게 끌려갔다. 위험을 감지한 한 교인이 피할 것을 권했지만 김 목사는 단호했다. “목사가 양들을 버리고 어딜 가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시다.” 김 목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목숨 걸고 주일 지킨 박기천 전도사=박기천(1920∼1950) 전도사는 주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공산정권과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산 사람을 신으로 모실 수 없다”며 동방요배(일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를 거부해 소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박 전도사는 광복 직전 경남 거창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주남선 목사의 주선으로 북상교회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해 50년 경남 합천의 가천교회로 교역지를 옮겼다. 얼마 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공산군은 목회자를 탄압했다. 박 전도사는 밤마다 뒷산으로 몸을 피해 기도했다. 공산군은 이틀이 멀다하고 집에 찾아와 가족에게 박 전도사의 행방을 캐물었다. 그의 아내는 맘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그해 7월 병으로 숨졌다. 박 전도사도 같은 달 아내를 따라갔다. 7월 마지막 주 주일 뒷산에서 내려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공산군이 들이닥쳤다. “지금은 예배시간이오. 예배를 마치고 나갈 것이니 기다리시오.” 박 전도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라고 공산군을 다그친 뒤 예배를 마치고는 연행됐다. 그는 성도들에게 주일에 치러지는 지방 행정위원 선거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로 구금됐다. 공산군은 주일에 시키는 일을 하면 풀어주겠다고 박 전도사를 회유했다. 그러나 박 전도사는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며 거부했고 함께 수감됐던 이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6개월 뒤 발견된 그의 시신은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가치 따라 좌·우 포용한 서기훈 강성갑 목사=서기훈(1882∼1951) 목사는 광복 후인 1947년 6월부터 강원도 철원 장흥교회에서 사역했다. 서 목사는 기독교인 중심으로 구성된 대한청년단의 고문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단원들이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구금하고 일부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서 목사는 단원들을 강하게 질책했고 남은 이들을 풀어줬다. 좌·우 이념보다 기독교적 가치를 우선한 것이었다. 그는 생전에 좌익과 우익을 아우르기 위해 힘썼지만 희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공산군은 좌익을 사살한 자의 이름을 대라며 서 목사를 고문했고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51년 1월 8일 총살했다. 그는 죽기 전 이런 유시를 남겼다. ‘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

경남 김해 한얼중학교 교장을 역임한 강성갑(1912∼1950) 목사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50년 8월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 처형되기 1주일 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어린 중학생을 전쟁터로 보내 총알받이로 삼으려는 당국의 조치에 항의했고, 여성을 성폭행한 지역 경찰의 행동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구호품을 빼돌리는 공무원도 강하게 질책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연구원을 지낸 최태육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서 목사나 강 목사 같은 순교자들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진영의 논리에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며 “용서와 화해를 통해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고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적 가치, 즉 다른 이들을 포용하는 십자가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연약한 세대, 순교자의 삶 되새겨야”=한국교회는 이들 순교자의 피로 성장했지만 그들의 희생을 제대로 기리지 못했다. 강 장로 등 만경교회 순교자 15명의 이름은 최근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 순교자 명부에 오르지 못했다. 만경교회는 이들의 순교 64년 뒤인 지난해 10월에야 총회에 순교자 명부 등재 헌의안을 제출했다.

임석순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장은 영적 생명력을 위협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의 열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회장은 “순교했던 선조들이 희생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과 온전한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오늘날 교회들이 평안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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