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지훈] 푸른색 문장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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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단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는 한 노인이 등장한다. 이 노인은 한때 ‘전후(戰後)의 문제작가’로 평가받던 전도유망한 소설가였다. 하지만 절필을 선언한 뒤 종적을 감춘다. 노인은 시간이 흘러 죽음을 앞둔 어느 날 한 젊은 소설가에게 자신의 미발표 원고를 전달한다.

노인은 “작가의 일이란 교정하지 않은 초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시작한다”고 적었다. 검은색 볼펜으로 쓴 초고를 놓고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 자문하며 붉은색 볼펜으로 고치는 일이 ‘작가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제목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나. 노인은 검은색 볼펜으로 쓰고 붉은색 볼펜으로 고친 원고를 파란색 볼펜으로 다시 수정하려 한다. ‘푸른색 문장’은 붉은색 볼펜으로 초고를 고친 뒤에도 표현되지 않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담아낸 문장이다. 완전한 진실이 담긴 글.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쓸 수 있는 ‘최후의 문장’인 셈이다.

2006년 12월에 입사했으니 기자로 일한 지도 어느덧 9년이 다 돼 간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누군가를 만나 인터뷰하는 일이 업무의 거의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노트북을 켜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이처럼 객쩍은 상상을 했던 건 내 주변 사람들을 내가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우리 어머니의 삶을 모른다. 당신의 어린시절이 어땠는지, 유년기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아버지와의 연애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노트북을 켜놓고 질문을 던진 뒤 답을 받아 적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보았다. ‘주말마다 한 명씩 인터뷰를 하자. 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 나가자. 1년이면 50명은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계획을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수없이 많은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내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 역시 가뭇없이 사그라졌다.

가령 2년 전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던 가수 한대수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내가 만난 인터뷰이 중 가장 기구한 가족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한대수의 아버지는 미국 코넬대에서 수학한 핵물리학자 고(故) 한창석(2010년 작고)씨다. 고인은 한대수가 한 살 때 돌연 실종됐다 17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과거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상태였다. 한국말도 몰랐으며 백인 여성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한대수는 특유의 호탕한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가 모든 걸 잊었더라고요. 그런데 음식 취향은 여전하더군요. 한국음식을 좋아했어요. 모든 걸 잊어버린 아버지였지만 입맛은 그대로였던 거죠. 그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인터뷰를 마친 뒤 한대수가 오래전 느꼈을 감정을 글로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해후한 아들이 느꼈을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식의 경험이 쌓이면서 타인의 고통을 완벽하게 담은 ‘푸른색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좋은 글쓰기란 ‘푸른색 문장’을 쓰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가 많다. 타인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얄팍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 내가 좀 더 근사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지난봄 한강의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인상 깊게 읽었다. 친구의 죽음에 숨겨진 사연을 추적해 가는 소설이었다. 저자는 ‘나약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린다.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 타인의 삶은 언제나 불가해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소설은 전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게 이 작품이다. 소설 속 표현을 그대로 옮겨오면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달의 표면은 50퍼센트가 아니라 59퍼센트다.’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포기하는 ‘9퍼센트’의 진실. 우리는 그것을 발굴해야 한다. ‘푸른색 문장’을 쓰는 일도 이 지점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박지훈 종교부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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