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지 기사의 사진
우리는 아까운 여성 지도자를 잃었다. 그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민주투사였다. 민주화 이후에는 여성계의 아이콘이었으며, 건국 이후 임명된 44명의 국무총리 중 유일한 여성이다. 제1야당 대표도 지낸 큰 인물이다. 그런 그가 불법 정치자금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구속됐다. 유일하게 구속된 전직 총리의 오명도 얻고 말았다.

한명숙 전 총리 얘기다. 여성계를 떠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화려한 경력과 온화하면서도 깨끗한 이미지로 그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가 더러운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에겐 충격이었을 테다.

그러한 충격 때문일까. 그가 몸담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재판 결과에 보통 사람들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야당을 말살하려는 신호탄”이라며 판결을 정치 재판으로 규정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도 야당에 대한 신공안탄압이라고 주장했다. 또 새정치연합 의원 20여명 등은 한 전 총리가 수감되는 서울구치소 앞에서 청렴과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꽃을 그에게 주며, 민주화 투쟁 때 단골로 불렸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울면서 합창했다. 독재 권력에 항거하다 끌려가는 민주투사를 보내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들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야권 인사들이나 한 전 총리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그가 정권의 표적이 돼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검찰이 여권의 실세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살아남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권 성향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은 새정치연합이 빗나간 의리를 흉내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오랜 동안 한솥밥을 먹었고 지난 5년 동안 그의 무죄를 주장해 왔으며, 또 한 전 총리 자신이 승복할 수 없다는 판결에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 차원에서 사과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침묵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야당 탄압을 위한 정치 재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적어도 대법관 13명 전원이 유죄로 인정한 3억원 수수 혐의를 뒤집을 만한 증거를 한 전 총리 측이 제시해야 한다. 대법관들은 기업인 한모씨가 발행한 1억원짜리 수표가 한 전 총리 동생의 전세자금으로 쓰였으며, 한 전 총리가 한씨에게 2억원을 돌려줬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움직일 수 없는 유죄 증거로 보았다. 이러한 검찰의 주장에 한 전 총리 측은 한 명의 대법관도 이해시킬 만한 반론을 펴지 못했다.

한 전 총리 재판 결과 자체도 그렇지만, 재판 결과에 보인 당사자와 당의 억지스러운 반응이 중도 성향의 국민들을 새정치연합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을까 싶다. 빗나간 의리는 자해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총선을 반년 남짓 앞둔 새정치연합은 지금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 문 대표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야권 신당 출현이 기정사실로 돼 있어 야권 표 잠식이 불가피하다. 당내에서는 혁신 방향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으며, 공천 때가 되면 그 갈등은 폭발할 것이다. 거기다가 북한 김정은이 정부 여당을 도와주고 있다. 그의 무모한 도발에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치솟고 있다. 이와 함께 박 대통령의 방중(訪中) 외교도 여권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할 텐데, 이러한 상황에서 도덕성이 생명인 진보 제1야당이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자충수까지 두고 있으니 내년 총선을 어떻게 치르자는 건지 답답하다.

백화종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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