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3부)] 행동하는 양심으로 고비마다 억눌린 세상 숨통 틔워줬다

(제3부) 전후 한국교회의 민주화·통일운동 - <1> 한국교회의 민주화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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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4일 한국기독교회관의 모습.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구심점이었던 이 건물은 당시와 같은 긴박함은 없지만 오늘도 쉼 없이 기독교문화운동의 산실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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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오늘은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의 시작이다. 한국교회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 튼튼하게 뿌리내렸다. 광복 후 식민지 잔재와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단과 전쟁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견뎠고 독재정권 아래에서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선교 대국으로 성장했다. 3부에서는 4회에 걸쳐 전후 한국교회의 인권 및 민주화운동과 남북교류·대북지원 등 평화통일운동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인권 및 민주화운동에 횃불=1960년대 한국 사회는 4·19혁명과 5·16쿠데타라는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해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4·19혁명은 분단과 전쟁,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암울한 먹구름을 걷어내는 한줄기 햇살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4·19혁명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개혁, 국민의 기본권 보장, 부패척결, 법치주의 확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61년 5·16쿠데타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일본 자본을 통해 경제개발을 추진하려고 한·일국교 정상화 작업을 벌였다. 한국교회는 협정 내용이 굴욕적이라고 판단하고 ‘비준 반대’ 운동을 벌였다. 한·일협정은 시민들의 엄청난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65년 6월 전격적으로 체결됐다. 강신명 강원룡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의 지도자들은 그해 7월 서울 영락교회에 모여 구국기도회를 열고 규탄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비준안은 결국 국회에서 통과됐고 반대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때의 경험은 교회의 비판적 사회참여에 중요한 교훈으로 남았다.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박정희 정권이 69년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강행하려 할 때 절정에 달했다. 김재준 함석헌 박형규 등 에큐메니컬 진영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해 개헌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민주화운동의 성지, 종로5가=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기독교회관. 68년 준공된 이래 한국 현대사의 굵은 물줄기는 늘 이 회색빛 건물이 있는 ‘종로 5가’를 관통해 흘렀다.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그늘진 세월 속에서도 억눌린 사람들의 숨통을 열어주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래서 항상 그 이름 앞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한국기독교회관이 민주화운동과 사회참여의 중심지였던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대한기독교서회 등 진보적인 단체가 이곳에 입주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각종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회관을 일반 시민에게까지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젊은 목사들의 자생모임으로 74년 7월 시작된 ‘목요기도회’였다. 독재에 항거하다 구속된 많은 젊은이들과 동료들을 위한 순수기도모임이었지만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들이 하나둘 참여하면서 활기를 띠게 됐다. 이는 민주화운동가족실천연합회(민가협)의 모체인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탄압은 점점 커져만 갔다. 급기야 외압에 의해 한국기독교회관 측은 강당 대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구속자 가정과 교회를 전전하며 명맥을 잇던 목요기도회는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계엄포고령이 내려지면서 활동을 멈췄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NCCK를 중심으로 재개됐고 그 전통은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목요집회로 이어졌다. 그곳 현장에선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의 간극이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냐, 비신자냐’ 하는 구별도 없었다.

87년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해 조직된 사회운동단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사무실도 한국기독교회관에 있었다. 국본은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당시 국본 상임집행위원장 오충일(75) 목사와 NCCK는 사실상 6월 민주항쟁의 연락사무소 및 구심점 역할을 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본 발대식이 개최된 곳은 명동 향린교회였고 ‘6·10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렸다.

5월 27일 한국기독교회관 3층 예배당에 200여명이 모였고 국본 발대식이 시작됐다. 구속된 민통련 의장 문익환 목사를 대신해 부의장 계훈제(1921∼1999) 선생이 사회를 봤다. 서울 명동성당 5·18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 사건 진상을 폭로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승훈 사제가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함석헌 김대중 김영삼 등 8명을 고문단으로 추대하고 박형규 목사와 이우정 박사, 김승훈 사제 등 11명을 상임대표로 뽑았다.

오 목사는 32명 상임집행위원 중 집행위원장으로 지명됐다. 발대식 후 상임집행위원들은 곧바로 6·10 국민대회 준비에 착수했다.

“뎅∼땡∼뎅∼땡∼” 마침내 6월 10일 정오, 성공회 대성당 종이 42번 울렸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 42년 종식을 갈망하는 비장한 소리였다. 타종 후 국본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권력승계는 원천무효임을 선언한다”고 외쳤다. 6월 민주항쟁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19일 뒤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는 특별선언을 했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이웃과 사회, 인간과 인간의 삶의 현실에 대한 교회적 관심과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다”면서 “결과적으로 교회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 한국의 정치현실을 변화시키고 오늘과 같은 보다 민주적 사회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김명기 국민일보목회자포럼 사무총장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는 한국교회가 벌인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현재 중·고교 근현대교과서에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 왜곡·축소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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